박광수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학고재서 회화 21점
유치와 지뢰가 함께 묻힌 고향, 화려한 색 아래 남은 기억
청록과 보랏빛 가지가 뒤엉킨 숲 아래 한 사람이 길게 누워 있다. 갈비뼈가 드러난 몸 옆으로 풀이 치솟고, 노란 얼굴 위로는 잎과 줄기가 빼곡하다. 박광수(42)의 그림 '모든 하늘'인데, 정작 하늘을 보려면 이 사람처럼 누워야 할 것 같다.
박광수, ‘모든 하늘’, 2026, 캔버스에 유채, 90.9×72.7㎝. 무성하게 뒤엉킨 숲 아래 한 사람이 길게 누워 있다. 생장하는 식물과 움직임 없는 인물이 대비를 이룬다. 학고재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에는 회화 21점이 걸렸다. 여덟 점으로 이뤄진 '모든 하늘' 연작의 인물들은 잠든 것인지, 쉬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주변의 식물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데 사람은 고요하다. 화려한 숲을 감상하다가도 누운 몸이 자꾸 눈에 걸린다.
'마른 식물이 타는 냄새'에는 새를 품은 푸른 인물이 서 있다. 머리 위 하늘에는 뇌를 닮은 형상이 떠서 번개를 내린다. 숲속 사람을 찾고 나면 이번에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 풍경을 이룬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철원의 들판과 나무가 바탕이라는데, 고향 풍경을 떠올릴 때 기대하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기억하는 여름날을 들으면 조금 이해가 된다. 평상에 앉아 옥수수를 먹던 아이는 지뢰 지대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빠진 유치를 묻었던 고향 땅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뢰도 남아 있었다. 옥수수 알갱이와 치아의 닮은꼴을 따라 그린 '옥수수밭', 이를 묻었던 작은 구멍이 사람 몸을 들일 만큼 커진 '유치와 땅굴'은 여기에서 나왔다. 어른이 된 뒤 돌아보는 어린 시절에는 아이였을 때 보이지 않던 것까지 들어 있다.
박광수는 밴드 혁오의 '톰보이' 뮤직비디오 속 흑백 애니메이션을 그린 작가다. 검은 선을 수없이 쌓던 그림에 색이 더해졌고, 2023년 학고재 개인전 '구리와 손'에서는 유채색 회화를 본격적으로 펼쳤다. 이번 신작에서는 빽빽한 가지 너머로 물길과 평야가 열린다. 숲이 덜 무성해진 것은 아니다. 시선이 붙들리던 형상 뒤로 더 먼 풍경이 이어지면서, 가까운 잎과 멀리 놓인 땅 사이를 오가게 됐다.
전시를 준비하며 다시 찾아간 철원의 수풀이 계기였다. 한동안 화면을 정돈하려던 작가는 꺾이고 엉킨 채 자라는 가지들을 보고 왜 그림을 굳이 정돈해야 하는지 되물었다. 물감을 올렸다가 문지르고 긁어낸 뒤 다시 덮었다. 이미 그린 선을 지워도 다음 색 아래 흔적이 남는다. 앞선 장면이 사라지지 않은 채 새 장면에 끼어드는 모습은, 오래된 일을 떠올릴 때 다른 기억이 불쑥 따라오는 경험과 닮았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멀리서 본 색만으로 다 읽히지 않는다. 밝은 부분에 다가가면 엉킨 선과 덧칠 아래의 자국들이 드러난다. 작가는 최근 흰색으로 화면에 무게를 주고, 검은색에 가까운 어둠으로 공간을 비트는 데 관심을 뒀다. 전시 제목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대지와 휴식의 몽상'을 읽다가 떠올렸다. 우유의 불투명한 흰색 안쪽에 어둠을 상상했던 대목이다. 흰색을 밝음으로만 여기면 놓치게 되는 깊이가 그의 숲에도 있다.
작가는 이번 그림 속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보았을지도 모르는 하늘"도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 문장과 함께 '모든 하늘'을 돌아보면, 누운 사람을 내려다보던 시선으로는 보지 못한 풍경이 있다. 그 사람이 올려다볼 가지 사이의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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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썼다. "집과 고향은 같은 자리에 남아 있어도 그것을 집과 고향으로 만들었던 시간은 없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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