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 17일은 '성 패트릭의 날'이다. 5세기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패트릭을 기리는 가톨릭교회의 축일이다.


성 패트릭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브리튼섬(오늘날 영국)에서 태어났다. 16세 무렵 아일랜드인들에게 납치돼 약 6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성직자가 된 그는 자신을 노예로 잡아갔던 아일랜드로 다시 건너가 선교 활동에 나섰다. 토착 신앙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일랜드 북서부의 더그호에는 축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 스테이션아일랜드가 있다. 성 패트릭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오늘날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기독교 순례지 중 하나다.

[빵 굽는 타자기]호수 속 괴물부터 백설공주까지…살아 숨쉬는 중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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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호(Lough Derg)는 아일랜드어로 '붉은 호수'라는 뜻이다. 먼 옛날 이 호수에는 사람과 동물을 잡아먹는 거대한 뱀 모양의 괴물이 살았다고 한다. 아일랜드 전설에 따르면 코난이라는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일부러 잡아먹힌 뒤 배를 찢고 나와 괴물을 죽였다. 이때 흘러나온 괴물의 피가 호수를 붉게 물들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괴물을 물리친 주인공이 성 패트릭으로 바뀐다. 여기에 성 패트릭이 연옥으로 통하는 동굴을 발견했다는 전설까지 더해지면서 더그호와 스테이션아일랜드는 중세 기독교의 주요 순례지로 자리 잡았다.

스테이션아일랜드는 '유럽의 도시에서 중세사 읽기'가 소개하는 17곳의 역사적 장소 중 하나다. 책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성 패트릭에 얽힌 전설을 흥미롭게 풀어내면서 토착 신앙의 기억이 기독교적 전승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소속 역사학자 16명이 함께 집필한 이 책은 유럽의 여러 도시와 장소에 얽힌 흥미로운 중세 역사를 소개한다. 파리와 로마, 런던 등 익숙한 도시뿐 아니라 스테이션아일랜드와 보름스, 나움부르크 등 상대적으로 낯선 장소들도 등장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독일 보름스는 중세 독일의 대표적인 영웅서사시 '니벨룽엔의 노래'의 주요 배경이다.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참석한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곳으로, 종교개혁의 성지이기도 하다.


독일 나움부르크 대성당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11세기에 건립이 시작돼 13세기에 주요 부분이 완성된 이 성당은 중세 조각의 걸작들로 유명하다. 서쪽 성가대석에는 성당의 설립자와 후원자를 형상화한 12개의 조각상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독일 귀족 여성 우타 폰 발렌슈테트를 형상화한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월트 디즈니의 1937년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등장하는 사악한 왕비의 모습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중세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켈트 신화 속 괴물이 기독교 성인의 전설로 다시 태어나고, 13세기의 조각상이 20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영감을 주는 등 중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자들은 중세를 공통의 종교와 문화를 바탕으로 유럽이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해 나간 시대로 바라본다. 당시 서유럽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공통의 신앙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기독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사회 통제의 기제로도 작동했다.


동시에 중세는 여러 민족과 지역이 저마다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이 통합을 추구하면서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중세의 경험이 유럽인들의 역사의식과 정체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유럽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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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시에서 중세사 읽기 | 성백용 외 12명 지음 | 푸른역사 | 408쪽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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