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문화재단 30주년 첫 소장품전…국내외 작품 70여점
김창열의 미공개 조각 '비나이다'부터 리히텐슈타인의 '불완전한 회화'까지
익숙한 작가의 이름 너머, 재료와 형식이 바꾸는 감상의 거리
물방울이 돌 위에 놓였다. 거친 옆면을 드러낸 돌의 윗면에는 크고 작은 투명한 덩어리가 올라앉아 있고, 뒤편 벽의 그림에는 한자 사이로 물방울이 맺혀 있다. 앞의 물방울은 유리, 뒤의 물방울은 그림이다. 같은 작가가 만든 두 물방울 사이에서, 눈은 닮은 것을 확인했다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한다.
이번 소장품전에서 처음 공개된 김창열의 조각 ‘비나이다’(1996). 돌과 유리로 물방울의 형상을 입체로 구현했다. 뒤편에는 회화 ‘회귀 SH97029’(1995)가 걸려 있다. 대림미술관
김창열의 조각 '비나이다'(1996)와 회화 '회귀 SH97029'(1995)다.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DCF Collection: 대림문화재단 소장품전'의 출발점에 놓였다. '비나이다'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물방울 화가'라는 익숙한 호칭으로 기억하던 작가가 돌과 유리를 다뤘다는 사실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러나 두 작품을 나란히 놓은 전시가 꺼내는 질문은 조금 더 깊다. 물방울을 그렸을 때와 물방울을 닮은 물체를 만들었을 때, 우리는 각각 무엇을 보는가.
대림문화재단 설립 3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는 재단이 처음 마련한 소장품전이다. 지난달 30일 개막해 피카소와 호안 미로, 로이 리히텐슈타인, 이우환, 박서보, 백남준 등 국내외 작가의 작품 70여점을 선보인다. 재단의 시작은 1996년이다. 미술관은 이듬해 대전에서 한림미술관으로 개관했고, 2002년 서울로 옮겨 대림미술관이 됐다. 사진 전문 미술관에서 출발해 디자인과 순수미술로 관심을 넓혀온 이력이 이번 컬렉션에 겹쳐 있다. 1층의 아카이브는 그 시간을 전시 도록과 기록으로 펼친다.
김창열의 물방울에도 하나의 재료나 형식으로 묶기 어려운 이력이 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며 문자와 물방울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후 캔버스에 직접 한자를 쓰고 그 위에 물방울을 그렸다. 천자문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배운 낯익은 글씨였다. '회귀'라는 연작의 이름에는 자신을 성장시킨 문화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담겼다. 화면 속 문자는 단순한 배경무늬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기억에서 온 글자 위에, 손대면 젖을 듯한 물방울의 형상이 놓여 있다.
'비나이다'에서는 그 관계가 달라진다. 유리는 실제로 빛을 통과시키고 주변을 비춘다. 그림 속 물방울의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화면에 고정돼 있다면, 유리가 반사하는 빛은 보는 자리와 주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돌의 거칠고 불투명한 표면은 유리의 매끈함과 투명함을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물방울이라는 같은 형상이 회화에서는 눈의 믿음을 시험하고, 조각에서는 물체와 공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셈이다. '물방울'이라는 소재를 알아보는 데서 멈추면 놓치기 쉬운 차이다.
‘대림문화재단 소장품전’ 2층 전시장 중앙에 놓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불완전한 회화’(1988). 왼쪽의 회색 삼각형이 직사각형 화면 밖으로 돌출된 작품으로, 목판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됐다. 대림미술관
원본보기 아이콘2층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림의 경계가 흔들린다. 리히텐슈타인의 '불완전한 회화'(1988)다. 노란색과 녹색, 회색 면 사이로 굵은 선이 지나고, 사선 줄무늬와 망점이 화면을 나눈다. 선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의 회색 삼각형이 직사각형 바깥으로 돌출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작은 돌출부 때문에 작품의 바깥 윤곽까지 다시 살펴보게 된다. 목판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작품이 속한 '완전한/불완전한' 연작에서 리히텐슈타인은 대량생산된 이미지를 가져오는 대신, 모눈종이에 스스로 구성을 짰다. 선을 이어 도형을 만들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규칙을 세웠으며, '불완전한' 작품에서는 선이 직사각형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화면의 가장자리를 놓친 듯한 상황을 작품의 형태에 포함한 것이다. 만화의 인물과 말풍선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이름 앞에서, 정작 여기서 살펴야 할 것은 선이 지나가는 경로와 화면이 끝나는 자리다. 제목의 '불완전함'은 감상의 평가가 아니라 작가가 정한 조형의 조건이다.
김창열의 조각과 리히텐슈타인의 판화를 이렇게 함께 읽을 수 있다. 한쪽에서는 그림 속 형상이 물체가 됐고, 다른 쪽에서는 선을 따라가던 화면이 네모의 경계를 벗어났다. 시대와 장르를 구분해 걸었다면 서로 먼 곳에 놓였을 작품들이다. 전시는 연대순의 설명을 앞세우기보다 형태와 재료를 비교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관객이 발견하는 연결은 거장의 명단보다 작품의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다.
3층에서도 이런 비교가 가능하다. 김창열의 한자와 물방울이 놓인 화면 가까이에 이강소의 넓고 성긴 붓질이 걸렸다. 물방울의 윤곽과 반짝임을 세밀하게 조절한 그림 곁에서, 붓이 지나가고 물감이 겹친 흔적이 두드러진다. 두 화면은 정지해 있지만 그 앞에서 짐작하게 되는 손의 움직임은 다르다. 점과 선, 반복과 여백을 다루는 이우환·하종현·박서보 등의 작품도 이 층에 함께 소개된다. 추상이라는 말로 묶인 화면들을 다시 나눠보게 하는 것은 결국 각각의 재료를 다룬 방식이다.
김창열의 ‘회귀’ 연작(왼쪽)과 이강소의 회화가 나란히 걸린 ‘대림문화재단 소장품전’ 3층 전시장. 물방울을 세밀하게 묘사한 화면과 자유로운 붓질이 두드러지는 화면을 비교해볼 수 있다. 대림미술관
원본보기 아이콘백남준의 작업과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이미지, 더그 드부아와 파올로 라엘리의 사진을 선보인 4층은 관객의 시야를 넓혀준다. 회화 앞에서 물감과 화면의 관계를 살폈다면, 여기서는 기술과 대중문화, 사적인 일상을 기록하는 방식이 작품의 일부가 된다. 사진에서 시작한 미술관이 여러 매체로 관심을 넓혀온 과정도 이 구성 안에서 돌아볼 수 있다.
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화려한 콘셉트를 덜고 '작품 그 자체'에 집중했다고 설명한다. 그 말의 설득력은 작품의 제목이나 제작 배경을 지울 때보다, 평소 이름에 가려졌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 생긴다. '비나이다'를 앞에 놓자 뒤편의 물방울 그림도 달리 보이고, 리히텐슈타인의 선을 따라가자 직사각형이라는 익숙한 틀이 새삼 의식된다. 소장품을 다시 건다는 일에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긴 작품을 다시 살펴보는 과정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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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의 두 물방울은 여전히 서로를 닮았다. 그러나 그림의 물방울을 보다가 돌 위의 유리로 시선을 옮기면, 그 닮음만큼 차이도 선명해진다. 한쪽에 그려진 빛이 다른 쪽에서는 실제 빛을 만난다. 이번 소장품전은 그 둘을 마주 놓는 데서 시작한다. 전시는 2027년 5월 30일까지. 관람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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