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부터 '신돈'·'인수대비'까지…정통 대하사극 이끈 극작가
1968년 희곡으로 등단…영화·현대극·문화사 드라마 넘나들어
"사건 아닌 사상 다루고 싶다"…역사 속 인간의 선택과 갈등 조명
향년 82세…빈소 순천향대서울병원, 발인 4일
왕의 곁에서 권력을 얻고 잃었던 여인들, 이상을 꿈꾸다 좌절한 개혁가들. 역사책에서는 몇 줄로 지나가는 인물들에게 욕망과 고뇌를 부여해 안방극장으로 불러낸 극작가 정하연(본명 정연)이 1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왕과 비', '명성황후', '신돈' 등 한국 대하사극의 대표작을 집필한 정하연 작가(본명 정연). 역사 속 권력과 인간의 욕망을 깊이 있게 그려온 고인은 지난 1일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아시아경제DB
2일 한국방송작가협회와 유족 등에 따르면 고인은 지병으로 지난달 31일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전날 오후 3시께 가족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1944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학교 연희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으며,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산울림'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같은 해 '무지개 쓰러지다', 이듬해 '환상살인'이 연이어 희곡 공모에 당선되며 극작가로 주목받았다.
1970년대에는 신성일 주연의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연애교실'(1971), '목마와 숙녀'(1976), '영광의 9회말'(1977) 등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후 라디오 드라마와 KBS '전설의 고향', 'TV 문학관' 등을 거쳐 방송극 작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대하사극이었다. '장녹수'(1995)를 시작으로 '조광조'(1996), '왕과 비'(1998~2000), '명성황후'(2001~2002), '신돈'(2005~2006), '인수대비'(2011~2012) 등을 집필하며 한국 정통 사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왕조의 흥망 자체보다 권력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선택과 욕망이었다. '장녹수'와 '왕과 비', '명성황후', '인수대비'에서는 궁중 정치의 격랑 속에서 권력을 얻거나 지키려는 여성들의 삶을 전면에 내세웠다. '조광조'와 '신돈'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꿈꿨으나 현실의 권력에 부딪힌 개혁가들의 이상과 좌절을 그렸다.
고인은 2005년 MBC '신돈' 방영 당시 인터뷰에서 "사건이 아니라 사상을 다루고 싶었다"고 밝혔다. 신돈과 공민왕의 개혁이 좌절됐어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시대에 끝내 실현되지 못한 이상 역시 다음 시대에 영향을 남긴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었다.
역사 속 권력을 다루던 시선은 현대극에서도 이어졌다. '모래 위의 욕망'(1992), '욕망의 바다'(1997), '욕망의 불꽃'(2010)에서는 성공과 부를 향한 집착이 인간관계를 뒤흔드는 과정을 그렸다. '춤추는 가얏고'(1990)에서는 가야금 명인의 예술혼을, '아내'(2003)와 '달콤한 인생'(2008)에서는 가족과 부부의 갈등, 사랑과 상실을 다뤘다.
한국 현대 문화사를 극화한 작업도 남겼다. EBS 문화사 시리즈 '명동백작'(2004)은 1950년대 명동을 무대로 문인과 예술가들의 삶을 그렸고, '지금도 마로니에는'(2005)은 1960년대 대학가의 청년 문화와 시대정신을 조명했다.
시청률 경쟁 속에서도 극작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고인은 '신돈' 집필 당시 후배들에게 시청률만 좇으면 장사꾼이 된다며, 글 쓰는 즐거움을 잃지 않고 인생을 그리는 작가가 되라고 당부했다.
고인은 '왕과 비'로 1999년 KBS 연기대상 작가상을 받았으며 이듬해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드라마는 2018년 MBC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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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는 아들 정요동씨와 딸 정요숙씨 등이 있다. 빈소는 2일 오전 9시부터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장례식장 5호실에 마련된다. 발인은 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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