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전기화의 꿈
풍력발전기 사라진 자리엔 잡초만…10여년 전 에너지 자립 실험의 흔적
멈췄던 풍력발전 다시 세운다…가파도 RE100 마을 조성 본격화
풍력 600kW·태양광 990kW·ESS 7MWh 구축
그리드포밍 ESS로 독립형 전력망 구현…디젤발전 의존↓

편집자주최근 중동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위기, 정부의 메가프로젝트 등으로 에너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차 에너지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 경제 성장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정부와 산업계에서 에너지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하는 기자들이 다양한 현안들을 짚어보고 대안을 찾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지난달 30일 제주 서귀포시 가파도 선착장 인근에 '가파도 친환경 명품섬'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과거 에너지 자립섬 조성사업을 추진했던 가파도는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결합한 RE100 마을 조성사업을 통해 친환경 에너지섬으로의 전환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사진=강나훔 기자

지난달 30일 제주 서귀포시 가파도 선착장 인근에 '가파도 친환경 명품섬'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과거 에너지 자립섬 조성사업을 추진했던 가파도는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결합한 RE100 마을 조성사업을 통해 친환경 에너지섬으로의 전환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사진=강나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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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가파도의 드넓은 들판 한편. 바닷바람이 쉼 없이 불어오는 이곳에는 한때 섬의 전기를 책임지겠다며 세워진 풍력발전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찾은 현장에는 거대한 날개도, 바람을 전기로 바꾸던 발전기도 보이지 않았다. 발전기가 서 있던 자리에는 빈터만 남아 있었다. 10여년 전 '탄소 없는 섬'을 꿈꾸며 시작된 가파도의 첫 번째 에너지 자립 실험이 남긴 흔적이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운진항에서 배로 10분 남짓이면 닿는 가파도. 면적 0.87㎢의 작은 섬은 제주에서도 바람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방으로 바다가 펼쳐지고 낮은 지형 위로 바람이 거침없이 지나간다.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을 결합해 화석연료 없이 전기를 생산하겠다는 구상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도 이러한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가파도는 2010년대 초반 제주도의 '카본 프리 아일랜드(Carbon Free Island·CFI)' 사업을 통해 에너지 자립섬의 가능성을 시험했던 곳이다. 풍력발전기 2기와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을 결합해 섬에서 필요한 전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설비와 전력변환장치 등에 고장이 발생했고, 핵심 설비였던 풍력발전기는 결국 2024년 9월 철거됐다.


섬의 전기를 책임지는 가파도발전소로 발걸음을 옮기자 에너지 자립섬이라는 이름과는 다른 현실이 드러났다. 현재 가파도의 주력 발전원은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디젤발전기다. 풍력발전기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30년 넘은 디젤발전설비가 섬 주민들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지난해 가파도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데 사용된 경유는 60만6000ℓ에 달했다. 하루 평균 1660ℓ가량이다. 풍부한 바람과 햇빛을 가진 섬이지만 주민들이 사용하는 전기의 대부분은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가파도의 에너지 자립 도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은 섬은 대한민국 에너지 전환의 미래를 검증하는 실험장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부와 한국전력공사는 과거 사업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풍력과 태양광, ESS를 결합한 새로운 RE100 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 차례 시행착오를 겪었던 가파도가 다시 '탄소 없는 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풍력발전기 사라진 섬…전기는 여전히 경유로

가파도발전소에서 만난 황제영 한전MCS 사업소장은 이곳에서 1년 넘게 근무하며 섬의 전력 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마라도와 비양도, 추자도 등 제주지역 도서발전소를 거쳐 25년 넘게 섬 생활을 이어온 베테랑이다.


황 소장은 과거 풍력발전기가 철거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강조했다. 그는 "풍력발전기뿐 아니라 전력변환장치 등 통합시스템에도 고장이 발생해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바닷가이다 보니 염분의 영향이 크고, 일부 전기설비가 외부에 노출돼 있었던 점도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섬의 발전설비는 육지보다 유지관리가 까다롭다. 강한 바람과 염분에 노출되는 데다 기상 악화로 배편이 끊기면 외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발전설비를 설치하는 일 못지않게 고장 없이 오래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가파도발전소에는 현재 150kW급 디젤발전기 3대가 설치돼 있다. 총 설비용량은 450kW다. 1992년 설치된 이들 발전기는 2003년 지방자치단체에서 한전으로 이관됐고, 2024년 8월부터는 한전MCS가 운영을 맡고 있다. 현장 직원 8명이 발전기 운전과 정비, 배전설비 관리 등을 담당한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가파도발전소의 연간 발전량은 1991MWh, 송전량은 1695MWh였다. 평균전력은 227kW였지만 최대전력은 8월 1일 434kW까지 치솟았다. 반면 11월 2일에는 최소전력이 58kW에 그쳤다. 전력 사용량이 가장 많을 때와 적을 때의 차이가 7배를 넘는 것이다.


가파도는 육지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전력계통이다. 육지에서는 여러 발전소가 송전망으로 연결돼 전력을 주고받지만 가파도에서는 자체 발전설비만으로 전력 수요를 감당해야 한다. 발전량이 부족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전기를 끌어올 수 없는 구조다.


섬 곳곳에 태양광 설비가 남아 있지만 발전량을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렵다. 과거 사업을 통해 일부 민가와 담수장 등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됐으나 정상 가동 여부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황 소장은 "지금도 잘 돌아가는 태양광 설비가 있지만 고장 난 것도 있다"며 "정확한 발전량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햇빛이 강해지면 디젤발전기의 출력이 눈에 띄게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사업이 아무런 성과를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정용 태양광을 설치한 일부 주민들은 전기요금을 절감하는 효과를 누렸고, 섬 전체에 구축된 지중화 배전망은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다만 발전설비의 장기적인 유지보수와 운영체계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점은 과제로 남았다.


황 소장은 "예전 사업에서는 설비가 고장 났을 때 어느 기관이 책임지고 수리해야 하는지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며 "유지보수 예산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는 장기간 유지보수까지 고려해 사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사업의 한계는 주민들의 신뢰와도 연결된다. 이미 한 차례 에너지 자립사업을 경험한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발전설비가 들어선다는 사실보다 그 설비가 얼마나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한 주민의 말이다. "처음 풍력발전기가 들어섰을 때만 해도 바람으로 섬 전체의 전기를 만든다고 하니까 주민들 사이에서도 기대가 컸죠.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발전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날이 늘더니 결국 철거까지 됐어요. 바람은 지금도 이렇게 잘 부는데 정작 전기는 여전히 경유로 만들고 있으니 아쉬운 마음이 있죠. 이번에는 발전기만 새로 세우는 데 그치지 말고 고장이 나더라도 바로 수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으면 좋겠어요."

지난달 30일 제주 가파도의 옛 풍력발전기 부지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한때 풍력발전기가 가동됐던 자리에는 '풍력'이라는 글자가 적힌 전력설비함만 남아 있어 과거 에너지 자립 실험의 흔적을 보여준다. 가파도는 기존 풍력발전기를 철거한 뒤 새로운 재생에너지 설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강나훔 기자

지난달 30일 제주 가파도의 옛 풍력발전기 부지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한때 풍력발전기가 가동됐던 자리에는 '풍력'이라는 글자가 적힌 전력설비함만 남아 있어 과거 에너지 자립 실험의 흔적을 보여준다. 가파도는 기존 풍력발전기를 철거한 뒤 새로운 재생에너지 설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강나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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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태양광에 ESS까지…달라진 두 번째 실험

정부가 추진하는 가파도 RE100 마을 조성사업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설계됐다. 단순히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전력 생산부터 저장, 소비까지 통합 관리하는 새로운 전력 공급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사업은 2026년부터 2027년까지 추진된다. 한전은 전력 공급설비 구축을, 한국에너지공단은 공용시설의 태양광과 히트펌프 설치를, 한전KDN은 통합제어시스템과 운영정보 공개 플랫폼 구축을 각각 맡는다.


핵심 설비는 풍력발전 600kW, 태양광발전 990kW, 저장용량 7MWh의 ESS다. 풍력은 200kW급 발전기 3기를 설치하고 태양광은 남향 경사형과 동서향, 수직형 등을 조합해 배치할 계획이다.


특히 이번 사업에서는 국내 기업이 생산한 발전설비와 저장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과거 사업에서 드러난 외국산 설비의 부품 수급과 유지보수 문제를 개선하고 국내 재생에너지 산업의 기술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눈여겨볼 기술은 ESS에 적용될 '그리드포밍(Grid-forming)'이다. 그리드포밍은 외부 전력망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압과 주파수를 형성하는 기술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태양광이나 ESS가 전력망의 전압과 주파수에 맞춰 작동했다면 그리드포밍은 독립된 전력망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다.


이는 가파도처럼 외부 전력망과 연결되지 않은 섬에서 특히 중요하다. 태양광은 밤에 발전할 수 없고 풍력은 바람이 약해지면 출력이 줄어든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수시로 달라지는 상황에서도 전력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디젤발전기를 대체할 수 있다.


새로 도입되는 ESS는 바나듐 흐름전지 방식이다. 전해액을 이용해 전기를 저장하는 기술로 장시간 충전과 방전에 적합한 특성을 갖고 있다. 한전은 이를 그리드포밍 기술과 결합해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은 시간에는 전력을 저장하고 부족한 시간에는 저장된 전력을 공급할 계획이다.


다만 재생에너지 설비를 충분히 구축하더라도 모든 시간대에 디젤발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지 않거나 흐린 날씨가 장기간 이어지면 ESS에 저장된 전력만으로 섬 전체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황 소장은 "가장 이상적인 것은 365일 재생에너지만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라면서도 "며칠 동안 바람이 불지 않고 햇빛도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면 ESS 용량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설비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공급하는 비중이 80% 이상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며 "디젤발전기는 전력이 부족하거나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용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한국에너지공단은 노인회관과 마을회관, 치안센터 등 공용시설 3곳에 총 76kW 규모의 히트펌프와 52.25kW의 태양광 설비를 설치할 계획이다.


히트펌프는 외부의 열을 이동시켜 냉난방에 활용하는 장치다. 기존 화석연료 중심의 난방을 전기로 전환하고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은 시간대에 전기를 열에너지로 활용하면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한전KDN은 발전량과 전력 소비량을 통합 관리하는 에너지관리시스템(EMS)을 구축한다. 풍력과 태양광, ESS의 운영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전력 공급을 최적화하고 발전량과 소비량 등의 정보를 공개하는 오픈 데이터 플랫폼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가 처음 구상한 사업 예산은 220억원이었지만 올해 확정된 예산은 80억원으로 조정됐다. 내년 예산은 57억7000만원으로 잠정 제시됐다. 한전은 올해 8월 공급설비 구축 기본계획을 확정했으며 태양광과 ESS 구매 절차를 진행하는 등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파도 풍력 부지내 동서향 수직형 태양광 혼합설치 조감도. 한전전력공사.

가파도 풍력 부지내 동서향 수직형 태양광 혼합설치 조감도. 한전전력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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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흔적이 새로운 자산으로

가파도가 다시 에너지 자립 실험의 무대로 선정된 데에는 과거 사업을 통해 확보한 기반시설도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실험에서 구축한 지중화 배전망과 변압기, 개폐기 등 전력설비를 새로운 사업에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 소장은 "가파도는 과거 사업을 추진하면서 전력선로와 변압기, 개폐기 등 기본적인 인프라가 이미 구축돼 있다"며 "다른 지역에서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면 이런 설비부터 설치해야 하지만 이곳은 새로운 발전설비를 기존 전력망에 연결해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가파도가 과거의 시행착오를 딛고 새로운 기술을 검증할 수 있는 실증무대로서 가치를 갖는 이유다. 기존 전력망을 활용하면서 국산 풍력과 태양광, ESS, 통합제어 기술을 결합해 안정적인 운영모델을 확보할 수 있다면 향후 다른 도서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정부는 가파도에서 확보한 기술과 운영 경험을 제주 전역으로 확산하고 국내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에도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와 ESS, 전력망 제어시스템을 하나의 패키지로 구성해 독립형 전력망이 필요한 지역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파도의 실험은 우리나라 전체의 에너지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전력계통을 운영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발전량의 변동성을 관리하고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기술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가파도에서 그리드포밍과 ESS, 전력 수요관리 기술을 결합한 운영모델이 검증된다면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망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작은 섬에서 시작한 실험이 국가 전력망의 미래를 위한 기술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주민들의 일상에도 변화가 기대된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아지면 경유 사용량과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고 공용시설의 냉난방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발전설비의 안정성이 높아지면 전력 공급에 대한 신뢰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민들은 새로 설치될 풍력발전기가 청보리밭과 어우러질 가파도의 미래 풍경도 기대했다. 섬에서 만난 또다른 주민은 "가파도에 어울리는 규모의 풍력발전기가 들어서면 청보리 축제와 연계해 관광 인프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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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멈춰 섰던 가파도의 에너지 자립 실험도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바람과 햇빛으로 섬의 전기를 만들겠다는 꿈이 이번에는 주민들의 일상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제주=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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