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새 판각 고불식 봉행…50~100년 장기 불사 착수
각수 15명 중심 후진 양성…판각학교서 670여명 전통기술 배워
산벚나무 300t 확보·'대장경 타운' 추진…국보 원본은 그대로 보존
몽골 침략 이겨내려던 고려의 염원, 21세기 인류 평화로 확장
800년 전 고려인들은 몽골의 침략을 막고 나라의 안녕을 빌며 나무에 불경을 새겼다. 오늘날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팔만대장경이다. 이제 그 조각도를 다시 든다. 인공지능(AI)이 방대한 경전을 순식간에 복제하고 번역하는 시대, 사람의 손으로 8만여 장의 경판을 새기는 데 앞으로 반세기에서 한 세기가 걸릴 전망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법보종찰 해인사는 29일 경남 합천 해인사 법계탑 마당에서 '해인사 장경도감 대장경 판각 고불식(告佛式)'을 봉행했다. 고불식은 불사의 시작을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이다.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팔만대장경 전체를 새로 판각하는 대장정에 나선다.
'다시 새기는 대장경, 인류를 향하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해인총림 방장 학산대원 대종사와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해인사 주지 혜일스님을 비롯해 불교계와 정부·지방자치단체 관계자, 신도 등 2000여명이 참석했다.
고불식에 앞서 법보전 앞마당에서는 불사의 원만한 성취를 기원하는 만일기도 입재식이 열렸다. 이어 스님과 판각학교 강사진, 교육생 등 30명이 전통 방식으로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판각 시연을 선보였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부처의 가르침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조성한 불교 경전 목판이다. 13세기 제작된 대장경판은 방대한 불교 경전을 정교하게 새긴 기록유산으로, 현재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존돼 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경전을 보관하는 해인사 장경판전 역시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장경판전은 자연 통풍과 습도 조절에 유리한 건축구조를 통해 수백 년간 목판을 보존해 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사업은 800여 년 전의 경판을 다시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고려인들이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며 경전을 새겼다면, 오늘날에는 전쟁과 기후위기, 핵 위협과 공동체의 단절 속에서 인류의 평화와 생명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았다.
해인사는 기존 국보를 대체하거나 단순한 복제품을 제작하려는 사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통 판각기술과 그 과정에 담긴 수행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승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판각은 목판을 준비하고 글자를 옮긴 뒤 조각도로 한 자씩 새기는 작업이다. 나뭇결의 방향과 조각도의 각도, 손에 가하는 힘에 따라 글자의 형태가 달라진다. 디지털 기술로 문자와 이미지를 복제하는 것과 달리 오랜 숙련과 집중이 요구된다.
해인총림 방장 학산대원 대종사는 이날 법어에서 "오늘 그대들이 든 판각의 칼끝이 나무에 닿을 때, 나무가 깎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대들의 번뇌가 깎이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판각을 단순한 제작 행위가 아닌 수행의 과정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를 위한 준비도 진행 중이다. 해인사는 2023년 전통 판각기술의 교육과 대장경 조성을 총괄하는 장경도감을 설립했다. 산하 판각학교에서는 국가·지방무형유산 각자장 등 10여명의 교수진 지도 아래 스님과 재가자 670여명이 전통 판각법을 배우고 있다.
현재 실제 판각에 참여하는 각수는 약 15명이다. 해인사는 이들이 후진을 양성하며 작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전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완성까지는 50~100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초 알려진 5~10년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경판 제작에 필요한 재료도 확보하고 있다. 해인사는 주요 재료인 산벚나무 약 300t을 확보해 제재와 건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장기적인 목재 수급을 위해 사찰 소유 토지에 돌배나무 2000그루도 심었다.
앞으로 약 33만㎡ 규모의 사찰 소유 부지에는 전통 판각 교육과 경판 제작을 지속할 수 있는 '대장경 타운'을 조성할 계획이다. 경판 제작뿐 아니라 판각기술 연구와 교육, 디지털 기록 구축 등을 함께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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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일스님은 이날 발원문에서 "글자 하나를 새기는 데 세 번 절하는 정성을 담겠다"며 판각의 정신을 이어갈 인재 양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대장경 조성이 인류의 지속 가능한 행복과 평화를 기원하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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