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이주의 전시는 전국 각지의 전시 중 한 주간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전시를 정리해 소개합니다.

데보라 터브빌의 ‘파리 파사주 비비엔의 계단-꼼 데 가르송 연작’(1980). 흐릿한 인물과 낡은 공간을 겹쳐 패션 사진을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장면으로 확장했다.  Deborah Turbeville / MUUS Collection, 피크닉

데보라 터브빌의 ‘파리 파사주 비비엔의 계단-꼼 데 가르송 연작’(1980). 흐릿한 인물과 낡은 공간을 겹쳐 패션 사진을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장면으로 확장했다. Deborah Turbeville / MUUS Collection,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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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 터브빌 사진전 '분위기'

모델은 카메라를 보지 않는다. 옷보다 낡은 벽과 흐릿한 빛, 인물 사이에 떠도는 침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데보라 터브빌(1932~2013)은 1970년대 패션 사진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 문법을 거꾸로 뒤집었다. 화려한 의상과 완벽한 육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생각에 잠긴 여성과 쇠락한 공간, 초점이 흐려진 이미지를 남겼다. 1975년 '보그'에 실린 '배스하우스'는 오래된 뉴욕 공중목욕탕에 수영복 차림의 여성들을 세웠지만, 어느 누구도 관객을 유혹하지 않는다. 패션을 보여주기 위해 찍은 사진이 패션 바깥의 감정과 서사를 품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데보라 터브빌의 ‘마담 뒤바리의 개인 거처-보이지 않는 베르사유 연작’(1980). 천으로 덮인 가구와 비어 있는 방을 통해 한때의 화려함보다 사라진 시간과 쇠락의 흔적을 포착했다.  Deborah Turbeville / MUUS Collection, 피크닉

데보라 터브빌의 ‘마담 뒤바리의 개인 거처-보이지 않는 베르사유 연작’(1980). 천으로 덮인 가구와 비어 있는 방을 통해 한때의 화려함보다 사라진 시간과 쇠락의 흔적을 포착했다. Deborah Turbeville / MUUS Collection,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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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빈티지 프린트와 콜라주 원본 102점, 새롭게 제작한 프린트 88점 등 약 200점이 나온다. 베르사유의 먼지 쌓인 방과 천으로 덮인 가구를 찍은 '보이지 않는 베르사유', 사진과 손글씨·텍스트를 찢고 붙인 '마키야주', 미발표 소설에서 출발한 130여점의 포토콜라주 '패스포트'까지 사진이 잡지의 한 페이지에서 하나의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도 따라간다. 터브빌은 이를 '분위기(atmosphere)'라고 불렀다. 실제로 있었던 과거보다 어쩌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진들이다. 2027년 2월28일까지, 서울 중구 피크닉.


티노 세갈. 사람의 몸과 목소리, 관객과의 만남 자체를 작품의 재료로 삼아온 참여예술 작가로, 제주에서는 자연 속에 체류하는 20시간의 몰입형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타라카 제주

티노 세갈. 사람의 몸과 목소리, 관객과의 만남 자체를 작품의 재료로 삼아온 참여예술 작가로, 제주에서는 자연 속에 체류하는 20시간의 몰입형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타라카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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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노 세갈 제주 프로젝트

작품을 보고 나왔는데 보여줄 사진도, 만질 물건도 없다. 티노 세갈의 작업은 사람의 몸과 목소리, 관객과의 만남이 벌어지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올봄 리움미술관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연 세갈이 이번에는 전시장을 떠나 제주 숲과 정원으로 들어간다. 참가자는 서귀포의 자연 속을 걷고 쉬고 머물다가 예고 없이 등장하는 '해석자(Interpreter)'와 만나 대화하고 움직인다. 누가 관객이고 누가 작품인지 나누던 경계도 그 순간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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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는 짧게 전시장을 순회하는 관람보다 20시간 동안 한 장소에 체류하는 경험에 가깝다. 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에 세갈의 참여형 작업과 인문학 강의, 제주 자연밥상이 연결된다. 그의 작품이 물질 대신 관계를 재료로 삼아왔다면, 이번에는 그 관계를 만드는 시간 자체가 하루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미술관의 흰 벽 대신 숲과 정원, 정해진 동선 대신 우연한 만남이 작품의 조건이 된다. 예술을 무엇으로 '보았는가'보다 그 시간 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묻게 하는 프로젝트다. 11월29일까지, 제주 서귀포시 타라카 제주.

고니의 ‘망원경’(2026). 열쇠와 병, 잔 등 가까운 사물의 이미지를 화면에 겹쳐 놓으며 먼 풍경과 눈앞의 대상 사이에 놓인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탐색한다. 더 소소

고니의 ‘망원경’(2026). 열쇠와 병, 잔 등 가까운 사물의 이미지를 화면에 겹쳐 놓으며 먼 풍경과 눈앞의 대상 사이에 놓인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탐색한다. 더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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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 개인전 '망원경 Telescope'

망원경은 먼 것을 가까이 보여주지만, 그곳까지 데려다주지는 못한다. 고니는 그 남은 거리를 회화의 문제로 가져온다. 집 안의 가구와 작은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던 작가의 시선은 이번 전시에서 창밖의 풍경과 고분, 유적지, 공원 같은 바깥으로 넓어진다. 가까이 있는 열쇠와 병, 잔부터 멀리 떨어진 풍경까지 서로 다른 거리의 대상을 한 화면에 놓고, 무엇을 얼마나 가까이 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물감이 번지고 말라붙은 자리와 부분적인 콜라주는 사물의 모양보다 오래 바라본 시간이 남긴 흔적에 가깝다.

고니의 ‘결로 5(Condensation 5)’(2026). 희미한 색면과 격자, 부분적인 콜라주를 통해 오래 바라본 대상이 기억 속에서 흐려지고 다시 떠오르는 과정을 담았다. 더 소소

고니의 ‘결로 5(Condensation 5)’(2026). 희미한 색면과 격자, 부분적인 콜라주를 통해 오래 바라본 대상이 기억 속에서 흐려지고 다시 떠오르는 과정을 담았다. 더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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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에는 개인적인 거리도 겹쳐 있다. 작가의 외할아버지는 분단 이후 돌아갈 수 없게 된 고향을 자주 이야기했고, 고니는 그곳을 바라볼 수 있는 백령도를 찾았다. 갈 수 없는 땅을 시선만 먼저 건너가는 경험은 '망원경'이라는 장치의 역설과 맞닿는다. 멀리 있는 것을 눈앞으로 끌어당길수록 닿을 수 없다는 사실도 선명해진다. 회화 역시 실재를 대신해주는 창이라기보다, 대상과 나 사이에 남은 거리를 오래 바라보게 하는 도구다. 11월27일까지, 서울 중구 더 소소.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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