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거점 늘렸지만
정작 '큰장' 선 미국·유럽 진출은 전무
대기업은 영미 로펌 직거래
중견기업은 고비용에 법률 사각지대
내수 포화에 해외로 눈 돌리지만
현지 네트워크·정부 인프라 뒷받침 절실
국내 대형 로펌들이 '토종 로펌' 꼬리표를 떼기 위해 글로벌 법률시장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법무법인 광장이 지난 23일 '인도네시아 데스크'를 신설하고 지평이 15일 베트남 지사 설립 20주년을 맞는 등 외형상 K로펌의 해외 영토 확장은 본궤도에 오른 모습이다.
로펌들의 해외 진출을 이끄는 동력은 급증하는 '아웃바운드(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관련 법률서비스)' 수요에 있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심사한 기업결합 금액 358조원 가운데 85%가 외국 기업 관련 거래였다. 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액도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K로펌, 해외 법률 수요 급증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시 가장 큰 복병은 예측 불가능한 현지 규제와 행정 관행이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유럽연합(EU)의 외국보조금규제(FSR) 등 자국 법령의 역외 적용이 넓어지면서 우리 기업들이 불시에 조사나 제재 타깃이 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신흥국에서는 정권 교체만으로 인허가 기준이 뒤집히기도 한다. 지난해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대규모 이민 단속 사태처럼 파견 인력의 체류자격 문제도 핵심 리스크로 부상했다.
대형 로펌들도 체질 개선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로펌들은 단순 중개 역할을 넘어 본사가 전체 거래구조와 일정을 지휘하고 현지 로펌을 선별 통제하는 '리드 카운슬(Lead Counsel·총괄 자문사)' 체제로 진화하는 추세다. 김앤장과 태평양·세종·율촌·화우·지평 등 주요 로펌들은 본사가 단일 창구 역할을 맡아 전략 수립과 계약서 초안 작성을 주도한다. 꼭 필요한 현지 쟁점만 현지 로펌에 선별 의뢰해 시차·언어 장벽과 법률비용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율촌이 올해 통상 전문가 50여명을 집결해 '글로벌통상센터'와 '대미투자 TF'를 가동한 것이나 태평양이 과거 LG화학과 미국 GM의 합작법인 설립 당시 현지 로펌 없이 단독으로 자문을 완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진국에선 존재감 미미
로펌들이 체감하는 현장의 벽은 여전히 높다. 김앤장을 제외한 4대 대형 로펌(태평양·광장·세종·율촌)이 연 매출 4000억원을 돌파하고 내년이면 합산 매출 2조원 시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한정된 내수 시장을 두고 출혈경쟁이 심화할 뿐 선진국 시장 개척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 로펌업계 관계자는 "현재 한국 대형 로펌들이 진출한 곳은 아시아 신흥국에 그칠 뿐 정작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 시장에는 아예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영미권 글로벌 로펌 30여 곳이 한국에 진출해 시장을 장악하고 일본·중국의 5~6개 대형로펌이 일찌감치 미국 현지에 거점을 마련한 것과 대조적이다.
대형 로펌 경영부문 대표는 "최근 대미 투자 규제 특수가 일고 있지만 미국 현지 법령 이슈의 과실은 결국 영미계 로펌들이 독식하는 구조"라며 "일본 기업들은 미국 투자시 자국 로펌을 거쳐 현지 로펌을 쓰지만, 한국 대기업들은 국내 로펌을 건너뛰고 곧바로 미국 로펌과 직거래하는 문화가 굳어져 있다"고 했다. 대기업 지주사 차원에서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위해 국내 로펌을 컨트롤타워로 두고 싶어 해도, 각 계열사와 이견이 크거나 국내 로펌의 현지 대응력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제도적 뒷받침 필요
로펌업계는 K로펌과 기업들의 글로벌 영토 확장을 뒷받침하려면 정부의 제도적 인프라가 전면 업그레이드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통상협상 테이블에 법률시장 '상호주의 불균형 해소'를 공식 의제로 올려 상대국의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법무부의 '해외진출기업 국제법무지원단' 등 기존 프로그램을 넘어 국가별 규제 정보 제공, 현지 정부·기관 네트워크 구축, 글로벌 인재 양성(장기 해외 파견·로스쿨 교류)을 상시 지원하는 전담 인프라 확충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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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과 동반 진출하는 중소·중견 협력업체(벤더) 대상 실무 지원도 시급하다. 수출지원 사업에서 후순위로 밀려 있는 '초기 법률실사 및 계약 검토 비용'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진단이다. 한 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중소·중견기업들은 해외 로펌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데다 한국보다 두 배나 비싼 시간당 2000달러(약 280만원) 수준의 미국 로펌 자문료를 감당하지 못해 법률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면서 "이런 수요를 충족할 법률서비스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태원 기자 peaceful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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