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 초청 두 번째 모션캡처 배우 한우진
허범욱 감독 유작 '구제역에서…돌아온 돼지'
"눈동자부터 미간까지 얼굴 연기의 절반은 눈"
"AI 영상 향상에 실제 배우 연기는 필수"
인공지능(AI)이 영상 제작의 문턱을 낮추고 있지만 기술만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다. 인물의 움직임에 스며든 감정과 호흡이다. 영화 한 편에서 30개 캐릭터를 홀로 연기한 모션 캡처 배우가 이 가능성에 주목해 창업에 나섰다. 배우의 연기에 AI 기술을 접목해 제작 효율을 높이면서도 인물의 감정과 감독의 연출 의도를 살리겠다는 구상이다.
한우진 한니버스 대표는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화려하고 정교한 그림은 기술이 만들 수 있어도 그 안에 담기는 감정과 호흡은 결국 배우의 몫"이라며 "실제 연기에 AI를 더할 때 더 나은 콘텐츠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고(故) 허범욱 감독의 유작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에서 30개 캐릭터의 움직임을 모두 연기했다. 작품은 2024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 초청됐고, 그 역시 모션 캡처 배우로 레드카펫을 밟았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과 '혹성탈출'의 시저를 연기한 앤디 서키스에 이어 두 번째다. 이 경험은 지난 2월 연기 기반 AI 콘텐츠 스타트업 한니버스를 설립하는 밑거름이 됐다.
영화는 살처분 구덩이에서 살아남아 인간이 되려는 돼지 H와 폭력에 시달리다 짐승의 삶을 택한 청년 정석의 이야기다. 두 인물은 서로의 피를 통해 반인반수가 되지만 정반대의 삶을 꿈꾼다.
모든 캐릭터를 한 배우가 맡은 것은 허 감독의 뜻이었다. '작품 속 인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에서다. 한 대표는 대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인물까지 연기했다. 당초 5개월, 8회차로 예정됐던 촬영은 3년으로 늘어났다. 그는 "감독님이 완벽을 추구한 데다 애니메이션 특성상 세밀하게 수정할 부분도 많았다"고 돌아봤다.
모션 캡처는 배우의 움직임과 표정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 가상 캐릭터에 구현하는 기술이다. 의상과 소품, 배경은 물론 상대 배우도 없는 공간에서 연기해야 한다. 한 대표는 "머릿속에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려놓아야 한다"며 "일반적인 연기보다 상상력과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긴 촬영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허 감독에 대한 신뢰였다. 실사 연출 경험은 없었지만 정교한 콘티와 뚜렷한 작품 세계로 배우를 이끌었다. 촬영 전에는 캐릭터의 탄생 배경과 상징까지 설명했다. 한 대표는 "모든 인물에 감독님의 경험과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며 "새롭게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감독님의 의도를 믿고 따랐다"고 했다.
인물의 감정은 작은 움직임에도 녹여냈다. 네 발로 걷던 H가 처음 두 발로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갓난아이의 걸음마를 참고했다.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처음 품는 순간이었다. 돼지에게 없던 관절과 발가락이 생겼을 때의 낯선 감각을 표현하려고 해부학 자료까지 살폈다.
반인반수가 된 정석은 달라진 몸에 자신감을 얻어 어깨를 펴지만 걸음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외형이 변해도 내면의 상처는 남아 있다는 의미다. 한 대표는 "캐릭터의 심리와 살아온 시간이 걸음걸이에서도 드러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은 유일한 여성 캐릭터 지은이다. 폭력과 트라우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정석에게 희망을 전하는 존재다. 그는 여성스러운 몸짓을 흉내 내기보다 인물의 진심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처음에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어요.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씩 이해가 됐습니다. 제가 연기하는 정석에게 힘을 건넨다는 마음으로 임했죠."
표정에서는 눈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다뤘다. 장비의 한계로 몸과 얼굴을 따로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연기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가깝다"며 "눈동자뿐 아니라 미간과 주변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영화에 사용되지 않는데도 모든 대사를 직접 말하며 연기했다. 성우들이 캐릭터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어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완성된 영화를 본 지은 역의 김도희 성우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며 "제 연기 덕분에 감정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고 전했다.
3년의 제작 기간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꿨다. 촬영하는 동안 모션 캡처 장비와 작업 방식이 빠르게 발전했고, AI가 영상 제작에 활용될 가능성도 확인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AI 콘텐츠 마이크로디그리 과정을 밟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니버스가 개발하는 솔루션은 배우의 실제 연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촬영한 연기에 AI로 원하는 시각적 표현을 입혀 감독이 구상한 영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제작 과정은 간소화하되 캐릭터의 움직임과 감정은 사람의 연기를 토대로 유지한다.
한 대표는 "이제 프롬프트만 입력해도 다양한 영상을 만들 수 있지만 감독의 의도와 배우의 감정까지 온전히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배우가 가장 잘할 수 있다"며 "사람의 연기를 중심에 둔 AI 콘텐츠 제작 방식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강조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