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문화유산 대중화 이끈 미술사학자
친일파 유묵을 애국지사 글씨로 전시…검증 부실·이해충돌 논란
국감 이틀 만에 사의…2008년 숭례문 화재 이어 두 번째 중도 퇴진
국중박, 지난해 관람객 650만명·세계 3위…전시 신뢰 회복 과제
지난 7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을 찾은 애국지사 박원근의 아들 박용현씨는 아버지의 유묵으로 소개된 작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유품조차 남아 있지 않던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국가박물관이 찾아냈다는 감격이었다. 그러나 그 글씨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이 남긴 작품이었다. 더욱이 작품을 직접 추천한 사람이 박물관장이자 소장자인 유홍준이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한국 문화유산의 대중화를 이끈 미술사학자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지 15개월 만이다. 관람객 7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둔 국립중앙박물관은 수장의 개인 소장품 전시와 검증 부실 논란으로 학술적 신뢰에 타격을 입게 됐다.
유 관장은 21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그동안 국민 여러분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내주신 깊은 신뢰와 우리 박물관 직원들이 쌓아 올린 가치가 저의 개인적인 실수로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간의 모든 비판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며 "실추된 박물관의 명예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제가 관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의 질타를 받고 검증체계 개선을 약속한 지 이틀 만에 거취를 결정한 것이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 7월 1일 개막한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 출품된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이다. '한 그릇의 밥도 나라의 은혜'라는 뜻으로, 박물관은 작품에 적힌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근거로 충북 보은 출신 애국지사 박원근(1912~1950)의 글씨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지난 8월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1874~1959)이 일본 유학 시절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작품의 필자를 둘러싼 의혹이 제기됐다. 박물관은 8월 10일 작품을 철거하고 서예·근현대사·고문헌·보존과학 전문가 7명에게 검증을 의뢰했다. 이후 9월 7일 해당 유묵이 박중양의 글씨라는 결론을 공식 발표했다.
박중양이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2009년 발간된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도 기록돼 있었다. 국가박물관이 기존에 공개된 역사 자료와 작품의 필적 등을 충분히 대조하지 않은 채 전시를 진행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이유다.
처음에는 전시품의 필자를 잘못 판단한 학술적 오류로 받아들여졌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지난 15일 국회에 제출된 자료를 통해 작품의 소유주가 유 관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다.
유 관장은 2019년 온라인 경매에서 해당 유묵을 5만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경매에서는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참여했던 '박덕원'의 작품으로 소개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유 관장은 이 작품을 부여문화원에 기증할 목적으로 구입했으며, 특별전의 취지에 맞아 출품했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전시 결정 과정이었다. 국회 제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확정된 특별전 최초 출품작 목록에는 해당 유묵이 없었다. 그러나 유 관장이 5월 8일 작품을 추천한 뒤 19일 출품동의서와 인수증이 작성됐고, 22일에는 관장 보고를 거쳐 전시 위치까지 확정됐다. 추천에서 전시 위치 확정까지 14일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필자를 확인하기 위한 별도의 충분한 감정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드러났다. 유 관장은 지난 19일 국정감사에서 작품을 박원근의 글씨로 확신한 이유에 대해 "저 자신이 서예사의 전공자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문가인 관장의 판단이 박물관 내부의 검증 절차를 사실상 대신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기관장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에 활용하는 행위 자체도 논란이 됐다. 국립박물관 전시 이력이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이해충돌 소지를 면밀히 검토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 관장은 사적 이익을 취할 의도는 없었으며 전시 후 기증할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논란을 키운 또 다른 요인은 작품의 소유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물관과 유 관장은 작품 철거 이후 검증 부실을 사과하면서도 소장자가 관장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두 달여가 지난 뒤 국회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유 관장은 국정감사에서 처음에는 개인 소장품을 전시했다고 밝히는 것이 자랑처럼 보일 수 있어 주저했으며, 친일파의 작품으로 밝혀진 뒤에는 미술사학자로서 실수를 인정하기 부끄러웠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소장 사실을 공개하지 못한 것을 "중대한 착오이자 불찰"이라고 인정했다.
개인 소장품과 공적 전시의 경계에 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같은 특별전에는 유 관장이 소장한 '자수 상보자기'도 출품됐다. 유 관장의 배우자가 박물관에 기증한 석호상 등 2점의 홈페이지 공개가 늦어진 사실도 국정감사에서 지적됐다. 박물관 측은 무거운 유물을 사진실로 옮기기 어려워 고화질 사진 촬영이 지연됐다고 해명했다.
지난 2월 국립중앙박물관의 겸재 정선 관련 전시와 유 관장의 개인 저서 출간 시점이 맞물린 점도 논란이 됐다. 유 관장이 전시 연계 강연을 진행한 뒤 저서에 서명해 준 사실을 두고 공공기관의 전시와 개인 저술 활동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물관은 해당 전시가 정선 탄신 350주년과 서화실 재개관을 기념해 독자적으로 기획한 행사이며, 도서 출간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유 관장은 한국 문화유산을 대중에게 친숙한 이야기로 풀어낸 대표적인 미술사학자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영남대와 명지대 등에서 미술사를 가르쳤다. 1993년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답사 열풍을 일으키며 문화유산을 전문가의 연구 대상에서 대중의 관심사로 확장했다.
2004년 9월에는 참여정부의 문화재청장으로 취임해 문화유산 행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재임 중에도 여러 차례 논란을 겪었다.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동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종 내부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사실이 알려졌고, 2007년에는 문화재청이 그의 저서 5종을 정부 예산으로 구입해 홍보용으로 배포한 문제가 불거졌다. 유 관장은 도서 구입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관련 수입을 기부했다.
2008년에는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국보가 소실되면서 문화재청장으로서 관리·감독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시 배우자와 함께 유럽 출장 중이었던 사실이 알려지며 외유성 출장 논란에도 휘말렸다. 이번 사의 표명으로 문화유산 관련 국가기관의 수장 자리에서 두 번째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게 됐다.
유 관장에게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은 오랜 숙원이기도 했다.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장 개방형 공모에 지원했다가 내정설 등 논란 속에 신청을 철회한 뒤 20여년 만에 관장직에 올랐다. 지난해 7월 취임 당시에는 문화유산을 보다 폭넓은 대중에게 알리고, 한국미술의 역사와 가치를 국제적으로 소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특히 1970~1980년대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렸던 '한국 미술 5천년' 전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해 선보이겠다는 계획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유산을 K-컬처의 뿌리로 조명하고 박물관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취지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중적 인기도 가파르게 높아졌다. 지난해 관람객은 650만7483명으로 전년보다 약 72% 증가해 세계 주요 박물관 가운데 관람객 수 3위에 올랐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379만여명이 방문했으며, 지난 19일 기준 누적 관람객이 600만명을 넘어섰다. 유 관장은 국정감사에서 올해 연간 관람객이 7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성과는 K-컬처의 세계적 인기와 박물관 직원들의 오랜 노력, 전시·문화상품 사업의 성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유 관장 역시 적극적인 대외 활동과 강연으로 박물관의 대중적 관심을 확대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가치를 대중에게 쉽게 설명해 온 미술사학자의 강점이 국가박물관의 전시 검증 과정에서는 한계로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작품에 대한 전문가 개인의 확신과 국가기관이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학술적 판단은 구분돼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학예연구직의 독립적인 검토와 이견 제시가 기관장의 판단 앞에서도 충분히 보장되는지가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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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장은 이날 사의문에서 "박물관 연구직들이 오랜 시간 성심을 다해 준비한 '우리들의 밥상' 특별전의 의의가 이 일로 인해 퇴색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직원들과 국민에게 다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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