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소장품, 친일파 박중양 글씨 판명
검증·이해충돌 신고 없어…세 측면서 실패
'베스트 오퍼'로 본 사의 표명 뒤 남은 과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베스트 오퍼'에서 올드먼(제프리 러쉬)은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품 경매사이자 감정사다. 하지만 안목은 사적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된다. 진품을 발견하면 가치 없는 위작으로 깎아내리고 공범을 통해 헐값에 사들인다. 그렇게 모은 여인 초상화들은 비밀의 방을 가득 채운다. 공적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해야 할 감정의 권위가 사유화될 때 공정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스크린 속 이야기가 국내 최대 박물관에서 일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7월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서 '일반시국은'을 애국지사 박원근의 유묵으로 소개했다. 유홍준 관장이 2019년 온라인 경매에서 5만원에 사들인 작품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교차 검증에서 글씨의 주인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으로 판명됐다. 유 관장은 검증 미흡을 여러 차례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소장품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뒤늦게 드러났다. 유 관장은 21일 사의를 표명했다.
이번 사태는 도덕과 학문, 직업윤리 세 측면의 실패를 모두 보여준다. 도덕적 실패의 핵심은 은폐다. 공공기관의 수장은 오류가 생기면 그 경위를 투명하게 밝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유 관장은 박물관의 신뢰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미술사가로서 큰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했다"며 개인의 체면을 앞세웠다.
학문적 실패는 개인의 안목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검증 체계가 작동을 멈췄다는 점이 더 무겁다. 해당 유묵은 특별전 최초 기획안에 없었다. 유 관장의 추천으로 뒤늦게 추가됐다. 서예 전문가의 검증 없이 유 관장의 전언 등만을 근거로 박원근의 작품으로 판단됐다. 관장의 확신이 검증 절차를 대신한 셈이다.
직업윤리 측면에서는 전형적인 이해충돌이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윤리강령은 박물관 종사자의 개인 소장 활동이 기관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미국미술관장협회(AAMD)도 관장이 미술품을 수집할 경우 박물관과 이해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한 신중함을 요구한다. 국립박물관의 최고 책임자가 자기 소장품을 전시에 올리면 국가 기관의 전시 이력이 개인 자산에 덧붙는다. 박물관은 부여문화원에 기증하려고 사 둔 작품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기증 의사가 있었다고 해서 이해충돌의 소지가 사라지진 않는다. 이해충돌 신고도, 선정 과정을 남긴 문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외 미술계는 이런 이해충돌에 엄격하다. 2010년 미국 뉴욕 뉴뮤지엄은 다키스 조아누 이사의 개인 소장품으로 전시를 열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2017년 베아트릭스 루프 네덜란드 스테델릭 미술관장은 개인 자문회사 운영을 둘러싼 이해충돌 의혹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조사에서 결백이 확인됐지만, 사퇴는 이보다 먼저였다. 해외 미술관이 이해충돌을 얼마나 무겁게 다루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2022년에는 장뤽 마르티네즈 전 루브르 박물관장이 이집트 유물의 위조 출처 증명서를 묵인했다는 의혹으로 예비 기소되기도 했다.
'베스트 오퍼'의 결말에서 올드먼은 비밀의 방이 텅 빈 모습을 마주한다. 카페에서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얼굴엔 공허만 남아 있다. 박물관을 떠나려는 유 관장의 뒷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의 표명이 책임을 다한 명예로운 퇴진이라기보다, 평생 쌓아 온 학문적 명망과 대중의 신뢰가 비어 버린 방을 확인하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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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을 한 노학자의 몰락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사의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과제의 시작이다. 기획안에 없던 작품이 추천 한마디로 전시장에 걸리기까지 박물관에선 어떤 견제도 작동하지 않았다. 상호 검증이 무너진 조직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기 쉽다. 세계 최고의 감정사였던 올드먼조차 끝내 자신을 속인 가짜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사람의 안목과 권위가 검증을 대신하는 순간, 그 오류를 바로잡을 사람은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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