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용 '지정학과 실리콘 방패'
미·중 기술전쟁부터 북핵·호르무즈까지…세계의 균열을 'K-반도체'로 읽다
성과배분·지역투자까지 '실리콘 방패'의 문제로…국가안보가 된 반도체의 명암
반도체 책을 펼쳤는데 호르무즈해협과 핵잠수함이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나 북한의 핵미사일, 주한미군, 전작권까지 읽고 나서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도착한다. 정재용의 '지정학과 실리콘 방패'는 순서부터 조금 이상한 책이다. 반도체를 설명하기 위해 세계정세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이렇게 험해졌기 때문에 한국에는 반도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은 미·중 전략경쟁과 대만해협, 트럼프식 강대국 정치, 미·이란 및 러·우 전쟁, 북핵을 차례로 훑은 뒤 7장에서 비로소 K-반도체를 전면에 세운다. 저자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실리콘 방패'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초격차 기술과 공급망의 요충지를 가진 나라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된다는 주장이다. 책은 이를 '대미 제한적 편승, 대중 선택적 헤징, 초격차 기술을 통한 내적 균형'이라는 3축 전략으로 정리한다.
공교롭게도 책이 나온 바로 이때 SK하이닉스는 중국 다롄 공장에 미국산 장비를 넣을 수 있도록 허가받는 문제와 미국 내 새 낸드 공장 투자를 한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 공장 하나의 주소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 카드가 된 것이다. 9월 한국 반도체 수출은 603억달러로 사상 처음 600억달러를 넘었다. '실리콘 방패'라는 표현이 그저 책 제목의 수사만은 아닌 이유다.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책이 방패를 바깥의 적에게만 들이대지 않을 때다. 저자는 삼성전자 성과급과 파업을 '실리콘 방패의 균열', 반도체 이익 배분을 '배분의 덫'이라고 부르고, 호남 클러스터 논쟁에서는 전력·용수·인재를 따져 "정치 아닌 경제 논리"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장의 힘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반도체를 국가 생존의 문제로 끌어올리면 기술투자와 공급망을 훨씬 큰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반대로 국가안보라는 렌즈가 너무 강해지면 노동자의 성과배분이나 지역균형 같은 문제까지 '방패를 약하게 만드는 일'로만 읽힐 위험도 있다. 실제 현실은 벌써 책의 주장보다 복잡해졌다. SK는 광주 투자를 서두르겠다고 밝히면서도 전력과 용수 공급을 전제로 달았다.
정재용은 32년간 국제문제를 취재한 기자이자 한미동맹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다. 그래서 이 책은 반도체 입문서라기보다 한 기자가 오랫동안 지켜본 전쟁·동맹·중국·북한·기술을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묶어보려는 시론집에 가깝다. 책의 답은 분명하다. 방패를 더 두껍게 만들자는 것이다.
독자에게 남는 질문은 조금 다르다. 반도체가 국가의 방패가 되는 순간, 우리는 어디까지를 반도체를 위해 양보할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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