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미군기지가 현대미술의 무대로…'DMZ OPEN 전시: 스테이징' 개막
김선정 예술감독 기획, 국내외 작가 14명 참여
군대 화장실엔 낯선 생명체, 철책 안팎엔 멈춰 선 일상의 풍경

의자는 아홉 개인데 앉을 자리는 마땅치 않다. 등받이가 없거나 다리가 모자라고, 어떤 의자는 좌판마저 사라졌다. 떼어낸 조각들을 그러모아 만든 아홉 번째 의자도 온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작가 안규철은 이 불완전한 의자들을 느슨하게 원을 그리도록 배치했다.

이예은, '백연리의 사람들'(2026)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 설치된 이예은의 '백연리의 사람들'. 민통선 안 통일촌 주민들이 내어준 생활용품을 쌓아 올린 탑을 대형 사진으로 기록했다. 낡은 물건들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에 접경 마을의 일상과 삶의 시간이 담겼다. 경기도

이예은, '백연리의 사람들'(2026)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 설치된 이예은의 '백연리의 사람들'. 민통선 안 통일촌 주민들이 내어준 생활용품을 쌓아 올린 탑을 대형 사진으로 기록했다. 낡은 물건들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에 접경 마을의 일상과 삶의 시간이 담겼다.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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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누구도 앉아 있지 않은 자리. 파주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쪽, 한때 미군들이 오가던 건물에 들어선 이 풍경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전쟁은 멈췄지만 평화가 완성된 것은 아닌 땅. 이곳에서는 비어 있는 의자마저 73년째 이어진 정전(停戰)의 풍경처럼 읽힌다.


12일 개막한 'DMZ OPEN 전시: 스테이징'은 그 익숙한 모순을 예술의 언어로 다시 들여다보는 자리다. 경기도와 파주시가 공동 개최하고,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인 김선정이 기획을 맡았다. 국내외 작가 14명의 회화·사진·영상·설치 작품 26점이 캠프그리브스와 임진각 평화누리에 펼쳐진다.

전시장이 된 캠프그리브스는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 떨어진 옛 미군기지다. 1953년부터 2004년까지 미군이 주둔했던 막사와 시설들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미술은 흰 벽에 걸린 채 감상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건물의 오래된 타일과 녹슨 철제 설비, 창밖의 풍경이 작품과 함께 말을 건넨다.

오형근, '웃고 있는 병장과 차렷한 이병, 2010년 10월 21일'(2010)오형근의 사진 연작 '부조리 극' 중 한 작품. 군복을 입은 두 병사의 상반된 표정과 자세에서 집단의 규율과 개인의 모습이 교차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여전히 정전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포착했다.경기도

오형근, '웃고 있는 병장과 차렷한 이병, 2010년 10월 21일'(2010)오형근의 사진 연작 '부조리 극' 중 한 작품. 군복을 입은 두 병사의 상반된 표정과 자세에서 집단의 규율과 개인의 모습이 교차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여전히 정전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포착했다.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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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묘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옛 군대 화장실에서 펼쳐진다. 세면대 위에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물체들이 놓였고, 벽에 걸린 화생방 마스크에서는 붉은빛이 새어 나온다. 작가 연진영의 신작이다. 미군 군복과 군화, 라텍스, 비즈로 장식한 소변기까지 동원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군대라는 집단이 요구하는 남성성과 소셜미디어에서 외모를 극대화하려는 '룩스맥싱(looksmaxxing)' 문화의 접점이다.


제복을 입고 똑같은 규율을 따르던 몸이 이제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꾸미고 관리하는 몸과 겹친다. 개인을 지우는 군대와 개인을 과시하는 사회가 실은 닮은 구석이 있다는 발견이다. 무엇보다 작품이 놓인 장소가 의미심장하다. 과거 병사들이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고 제복을 매만졌을 공간에, 오늘날의 자아를 가공하는 기묘한 도구들이 들어섰다.

밖으로 나오면 또 다른 역설이 기다린다. 뉴질랜드에서 활동하는 이요나의 '대기실'은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복잡하게 연결한 구조물이다. 그 안에는 신호등과 가로등을 비롯해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도시의 사물들이 얽혀 있다. 그런데 정작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모든 길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한 구조다.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들이 가장 이동하기 어려운 땅에 모여 있다. 신호등에는 초록불이 켜졌지만, 건널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작품을 이루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평화누리의 푸른 나무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 곁에서 이예은의 사진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들판 한가운데 파란 플라스틱 통, 낡은 그릇, 화분 같은 물건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다. '백연리의 사람들'은 민통선 안 통일촌 주민들이 내어준 생활용품으로 만든 탑을 기록한 작품이다. 1970년대 안보와 영농을 위한 시범마을로 조성된 통일촌에서 주민들은 분단을 거창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생활의 조건으로 경험해 왔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군사시설이나 철책 대신 오래 쓰던 물건들로 불러낸다. 탑을 이루는 물건들은 서로 크기도, 재질도, 쓸모도 다르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떠받친다. 어쩌면 이곳의 삶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규철, '아홉 개의 의자'(2026)파주 캠프그리브스 카페 공간에 설치된 안규철의 '아홉 개의 의자'. 다리와 등받이, 좌판 일부가 사라진 의자들이 빈자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앉을 수 없는 의자들은 전쟁은 멈췄으나 평화는 완성되지 않은 정전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경기도

안규철, '아홉 개의 의자'(2026)파주 캠프그리브스 카페 공간에 설치된 안규철의 '아홉 개의 의자'. 다리와 등받이, 좌판 일부가 사라진 의자들이 빈자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앉을 수 없는 의자들은 전쟁은 멈췄으나 평화는 완성되지 않은 정전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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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것은 DMZ를 평화의 상징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위스 작가 데니스 베르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중립국감독위원회 장교들이 남긴 사진과 영상으로 '중립'이라는 말의 이면을 묻는다. 1953년부터 1980년까지 촬영된 기록에는 군사시설뿐 아니라 여가를 즐기는 장교들의 모습과 한국인들의 일상이 담겼다.


작가는 이 영상들을 다시 편집해 70분짜리 '스테이트 픽션. 겉으로만 중립적인'을 완성했다. 총을 들지 않고 관찰하는 사람의 시선은 과연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래된 필름의 색과 거친 화질이 오히려 기록을 둘러싼 질문을 선명하게 만든다.


사진가 오형근의 '부조리 극' 역시 군복 안에 가려진 개인을 응시한다. 운동장에 선 젊은 병사 둘. 한 사람은 차렷 자세로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털썩 주저앉아 카메라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자세는 군대의 위계만큼이나 각자의 성격과 감정을 드러낸다. 이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지만 전쟁을 전제로 유지되는 체제 안에서 살아간다. 극적인 전투 장면 하나 없이도 사진이 불편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이유다.


그러나 이 땅에 남은 시간이 인간의 것만은 아니다. 뉴질랜드 작가 자닌 랜더슨은 소설가 이현, 사운드 아티스트 레이철 시어러와 함께 만든 영상 '비무장화하는 이끼'에서 카메라의 시점을 인간에게서 빼앗는다. 철원의 벙커와 초소, 참호를 조금씩 뒤덮으며 자라난 이끼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인간이 그어놓은 군사적 경계와 무관하게 퍼져나가는 미세한 생명들. 콘크리트를 덮는 초록빛은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간을 인간과 전혀 다른 속도로 기록한다.

이요나, '대기실'(2026).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 설치된 이요나의 '대기실'. 신호등과 가로등 등 이동을 위한 사물들이 스테인리스 구조물 안에 얽혀 있다. 초록불은 켜졌지만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은 분단이 가로막은 이동의 자유를 환기한다.경기도

이요나, '대기실'(2026).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 설치된 이요나의 '대기실'. 신호등과 가로등 등 이동을 위한 사물들이 스테인리스 구조물 안에 얽혀 있다. 초록불은 켜졌지만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은 분단이 가로막은 이동의 자유를 환기한다.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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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 '스테이징(Staging)'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의 개념에서 가져왔다. 어떤 존재도 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환경,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갖춘다는 생각이다. 김선정 예술감독은 이번 전시를 통해 DMZ를 단순한 작품 전시장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역사와 현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무대로 전환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 기획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은 거대한 평화의 메시지보다 사소한 사물이 오래 눈에 남을 때다. 안규철의 빈 의자, 이예은의 낡은 생활용품, 연진영의 세면대와 자닌 랜더슨의 이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실을 환기한다. 역사는 기록관에만 보존되지 않는다. 누군가 앉았던 자리와 매일 사용하던 물건, 사람이 떠난 건물에 새로 자라난 생명에도 남아 있다. 캠프그리브스에서 예술이 보여주는 것은 전쟁의 장엄한 모습보다, 전쟁이 멈춘 뒤에도 계속되는 삶의 표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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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11월29일까지 이어진다. 캠프그리브스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임진각 평화누리의 야외 작품은 자유롭게 볼 수 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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