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감독, 역동성 덜고 관조의 시선 입혀
창작으로 맺은 연대·상실 무게, 건조하게 응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룩백'은 단순한 청춘물을 넘어, 창작을 매개로 한 실존적 투쟁과 상실 이후의 윤리적 애도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원작 만화가 지닌 폭발적인 역동성을 덜어낸 자리에, 인물들이 감당하는 시간의 무게를 특유의 관조적인 시선으로 채워 넣는다.


영화 '룩백' 스틸 컷.

영화 '룩백' 스틸 컷.

AD
원본보기 아이콘

영화는 초등학생 후지노(데구치 나츠키·나나세 후리)의 궤적을 따라간다. 교내 신문에 네 컷 만화를 연재하며 우월감에 차 있던 그는 은둔형 외톨이인 동급생 쿄모토(마키타 아쥬·오카다 로카)의 압도적인 작화를 마주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내 펜을 쥐고 연대하며 성장해 나간다.

고레에다 감독은 두 소녀가 만화를 그리는 행위를 외부 세계와 접속하는 치열한 과정으로 규정한다. 방 안에 틀어박혀 사회와 단절되었던 쿄모토와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허영심으로 만화를 그리던 후지노. 서로의 결핍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순간부터 만화는 단순한 유희가 아닌 실존을 증명하는 도구로 격상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엇갈렸던 창작 동기는 충돌하며 융합한다. 후지노의 외향적 욕망은 쿄모토의 내향적 순수몰입을 흡수하고, 쿄모토는 후지노를 통해 독자와 연결된다.


이 교감의 밀도는 대사보다 아날로그적 물성과 시선의 권력으로 드러난다. 좁은 방 안에서 종이를 긁는 펜 소리와 침묵, 잉크로 얼룩진 손과 겹겹이 쌓인 스케치북이 두 사람이 버텨낸 시간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묵묵히 서로의 등을 지켜보는 행위 또한 불완전한 두 개인이 세상에 흔적을 새겨 넣는 원초적인 연대로 나타난다.

영화 '룩백' 스틸 컷.

영화 '룩백'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

절제된 서사는 사실주의적 실사 표현을 통해 묵직한 중력을 얻는다.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프레임을 생략하고 공간을 왜곡하며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면, 이번 영화는 의도적으로 환상성을 거세하고 인물을 현실의 시간에 묶어 둔다. 35㎜ 필름에 담은 아키타현의 풍광과 자연광이 대표적 예다. 배경을 넘어 인물의 심리를 투영하는 지형도로 작동한다. 특히 창살을 통과해 어두운 방안을 침식하는 빛은 쿄모토의 고립감을 부각하는 동시에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시각적 구원을 부여한다. 그럴 때마다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정적인 롱테이크와 관찰자적 앵글로 철저한 객관성을 강제한다. 이는 빗속을 뛰어가는 명장면에서 역동성을 덜어내지만, 두 소녀가 겪는 창작의 뼈아픈 고통을 관객에게 더욱 생생하게 전이시킨다.


창작과 연대로 쌓아 올린 시간은 쿄모토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 윤리적 애도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후지노의 자책이 문틈으로 들어온 한 장의 네 컷 만화를 통해 구원의 역설로 전복된다. 문틈은 물리적 통로인 동시에 평행우주의 가능성과 현실의 비극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 공간을 벗어나기 직전의 순간을 실제 배우의 움직임을 덧그리는 로토스코핑(rotoscoping) 기법으로 표현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이는 육체적으로 부재한 쿄모토를 후지노가 자신의 펜 끝으로 다시 그려내어 생명력을 부여하는 애도의 행위이자, 존재를 스크린 위에 영원히 박제하는 매체 철학적 시도다.

AD

영화 '룩백' 스틸 컷.

영화 '룩백'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

애도의 끝에서 네 컷 만화는 후지노가 쿄모토를 고립에서 끌어낸 유일한 구원자였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파국 속에서도 연대했던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오열이나 신파 같은 감정 착취를 배제한 채 남겨진 자의 건조한 일상 묘사에 롱테이크를 할애한다. 거대한 공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의 무거운 책무를 비춘다. 결국 '등을 바라본다(Look Back)'는 행위는 과거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떠난 이의 등을 이정표 삼아 다시 창작의 고통 속으로 전진하겠다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표상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