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 블리스 룩셈부르크·김신욱 2인전 'Terrain Vague'
런던의 욕망과 공항 변두리의 고립…밤이 걷어낸 도시의 또 다른 얼굴
룩셈부르크 첫 한국 전시…11월7일까지 갤러리JJ
벽에 작은 표지판 하나가 붙어 있다. 'SUSSEX PLACE'.
김신욱, ‘Sussex Place’(2017). 런던 뉴몰든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의 삶과 주변을 기록한 ‘경계인’ 연작의 작품이다. 주소 표지판은 선명하지만 텅 빈 밤의 골목은 오히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장소처럼 보인다. 갤러리JJ
주소는 정확하다. 그런데 사진을 오래 볼수록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붉은 벽돌 건물과 주차된 자동차, 어두운 골목. 김신욱의 사진이다. 주소란 원래 사람과 장소를 정확히 찾아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는 주소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름은 남아 있는데 장소는 사라진다.
서울 신사동 갤러리JJ의 'Terrain Vague'는 그런 순간을 찍은 두 사진가를 마주 놓는다. 독일 태생으로 런던에서 활동해 온 루트 블리스 룩셈부르크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김신욱이다.
둘 다 밤을 찍는다. 하지만 닮은 점은 거기까지다. 룩셈부르크의 밤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유리와 물, 콘크리트와 금속, 네온과 그림자가 서로 반사되고 겹친다. 낮에는 초라했던 지하도와 시장, 주거단지가 밤이 되면 기묘하게 번쩍인다. 아름다운데 약간 불편하고, 낭만적인데 어딘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사진가는 도시를 예쁘게 찍는 대신 오래 노출한다. 그러면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색과 표면이 필름 위에 쌓인다. 밤이 도시를 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잉 노출시키는 셈이다.
루트 블리스 룩셈부르크, ‘Happy Days’(2026). 유리 너머 매달린 육류와 반사된 형상이 뒤섞이며 도시의 화려한 표면 아래 감춰진 육체성과 소비의 풍경을 드러낸다. 룩셈부르크는 진열과 반사, 밤의 인공광을 이용해 아름다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도시의 얼굴을 포착한다. 갤러리JJ
원본보기 아이콘김신욱은 반대로 덜어낸다. 그는 'Night Spotting'에서 히드로와 인천, 김포 등 국제공항 바깥을 찍었다. 활주로나 출국장은 없다. 철책과 잡초, 도로와 창고만 남는다. 낮에는 분명 영국이고 한국이던 장소가 밤이 되면 놀랄 만큼 비슷해진다.
비행기는 국경을 넘는데 공항 변두리에는 국적이 없다. '경계인'에서는 이 질문이 사람에게 옮겨간다. 런던 뉴몰든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 최씨의 주변을 찍었다. 김신욱은 그를 설명하지 않는다. 탈북민이라는 이름표보다 그가 선 자리와 주변의 거리를 보여준다. 떠나온 곳에는 돌아가기 어렵고, 도착한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상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작가가 정반대 방법으로 같은 곳에 도착한다는 점이다. 룩셈부르크는 너무 많이 보여줘서 도시의 익숙한 얼굴을 망가뜨린다. 김신욱은 너무 많이 지워서 장소의 정체성을 흔든다. 한 사람은 더하고, 한 사람은 뺀다. 결과는 같다. 우리가 낮 동안 너무 쉽게 믿었던 이름들이 흔들린다.
김신욱, ‘OZ521 Night Spotting’(2014). 주택가의 밤하늘을 항공기의 빛 궤적이 길게 가른다. 김신욱은 약 7년간 히드로·인천·김포 등 국제공항 외곽을 촬영한 ‘Night Spotting’ 연작에서, 밤이 되면 서로 다른 도시의 변두리가 놀랄 만큼 닮아가는 순간을 기록했다. 갤러리JJ
원본보기 아이콘런던, 공항, 이주민, 중심, 주변. 낮의 도시는 이런 단어로 질서를 만든다. 밤이 오면 그 분류가 조금씩 느슨해진다. 런던은 더 이상 관광도시가 아니고, 공항은 국제도시의 관문이 아니며, 한 사람 역시 하나의 출신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Terrain Vague'를 단순히 버려진 땅이라고 번역하면 아쉽다. 이 전시에서 그것은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상태에 가깝다. 도시가 무엇인지, 사람이 어디에 속하는지 잠시 확신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다.
다만 이 전시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도 있다. '밤'과 '주변부', '경계'라는 말을 너무 넓게 펼칠 때다. 이 단어들은 거의 모든 현대도시 사진을 설명할 수 있다. 두 작가가 흥미로운 것은 같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확실성을 망가뜨린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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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SUSSEX PLACE' 앞이다. 표지판은 여전히 정확하게 주소를 알려준다. 그런데 정작 사진 속 장소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끝내 분명해지지 않는다. 밤은 도시를 어둡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낮보다 정확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11월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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