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혜영과 낭독공연 ‘새’ 한국 초연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부 무대화
지난 7월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초연

"한강 작가님의 글은 너무 강렬해서 공연 장소가 어디든 그 힘을 잃지 않고 관객에게 강렬하게 다가가는 것 같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10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낭독공연 '새'의 한국 초연을 마친 뒤 이 같은 소감을 밝혔다.

'새'는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중 1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구성한 낭독공연이다. 2021년 출간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의 비극과 그 상흔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되며 1부의 제목이 '새'다.


'새'는 지난 7월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됐다. 축제 주최 측은 올해 한국어를 축제 공식 초청 언어로 선정했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한강의 작품을 낭독공연으로 기획했다. 지난해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을 연출한 줄리 델리케가 연출을 맡았다.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들의 증언을 모은 구술 기록문학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여러 맥락에서 연결 지점이 있는 셈이다. '새'는 2026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해외초청작에 선정돼 한국 초연이 이뤄졌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왼쪽)와 이혜영이 10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새' 낭독공연을 하고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배우 이자벨 위페르(왼쪽)와 이혜영이 10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새' 낭독공연을 하고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AD
원본보기 아이콘

'작별하지 않는다' 1부 '새'의 두 주인공은 인선과 경하다. 소설가 경하와 사진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인선은 과거 잡지사 취재를 함께하며 동료로 만난 뒤 20여 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새'는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로 향하는 경하의 여정을 그린다. 인선의 고향은 제주이고, 그는 어머니로부터 4·3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인선은 4년 전 어머니를 여읜 뒤에도 제주에 남아 목공 일을 하며 지낸다. 어느 날 목공 작업을 하다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인선은 서울의 병원에 입원한다. 자신을 찾아온 경하에게 제주 집에 홀로 남은 앵무새 '아마'에게 물을 주러 가달라고 부탁한다. 경하는 폭설을 뚫고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델리케 연출은 인선과 경하 두 주인공의 우정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일과 서로에 대한 존경으로 맺어졌다. 둘은 연약하지만 서로의 힘을 함께 나누고, 그 힘을 죽어가는 새를 구하는 데 쏟는다."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가 다음 날 아침 제주로 가겠다고 하자 인선은 당장 그날 밤 내려가달라고 한다. 내일까지 앵무새가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델리케 연출은 앵무새를 인간이 지닌 연약함을 상징하는 존재로 봤다. 그는 "인선이 자신도 굉장히 약해진 상태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앵무새를 살리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는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과거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되새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델리케 연출과 위페르 모두 '새'를 공연하기 전까지 제주 4·3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며 예술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델리케 연출은 "역사가 다 담아내지 못한 비극을 문학과 예술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문학과 예술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과거의 사람들과 후대의 우리를 연결하고, 산 사람과 죽은 영혼 사이의 대화를 이어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알렉시예비치에 이어 한강의 작품을 잇달아 연출하면서 "한 국가나 민족이 전쟁과 같은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도 공동체가 10년, 20년, 40년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침묵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다"고 말했다.


위페르는 제주 4·3은 한국의 역사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역사라고 말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많은 사건들도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예술가들이 그 이야기들을 하나둘 다시 꺼내 영화와 작품으로 만들면서 비로소 그 역사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이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하나의 나라에 국한된 것 같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진실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석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예술감독, 이혜영 배우, 이자벨 위페르 배우, 줄리 델리케 연출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최석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예술감독, 이혜영 배우, 이자벨 위페르 배우, 줄리 델리케 연출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원본보기 아이콘

인선 역을 맡은 이혜영은 한강의 소설은 아픈 역사를 다루지만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그는 "고통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봤지만 한강 작가의 소설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강 작가에 관심이 생겨 다른 책들도 찾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새'는 지난 7월 아비뇽 교황청 명예의 뜰에서 열린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됐다. 명예의 뜰은 아비뇽 페스티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야외 무대로 객석 규모가 약 2000석이다. 반면 한국 초연이 이뤄진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의 객석은 428석이다.


이혜영은 아비뇽 공연에서의 감동도 컸지만 실내에서 이뤄진 한국 공연에서는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야외에서 공연한 아비뇽에서는 바람을 비롯해 여러 자연적 요소가 함께했지만, 한국 초연은 실내 공연이어서 침묵이나 서로의 말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며 "두 인물의 관계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관객과도 더욱 가까워지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새' 공연 말미에는 제주 4·3의 인명 피해 규모 등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대목이 나온다. 지난 7월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는 한강 작가가 깜짝 등장해 직접 이 부분을 낭독했다. 이번 서울 공연에서는 15세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무대에 올라 같은 대목을 읽었다.

AD

델리케 연출은 이 역사를 알아야 할 새로운 세대에게 해당 부분을 낭독하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혜영 배우로부터 제주 4·3 사건이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이혜영 배우 세대도, 배우의 자녀 세대도 뒤늦게 알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새로운 세대가 이런 역사를 알아갔으면 한다는 생각에서 어린 학생에게 마지막 낭독을 맡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