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선 둠칫둠칫 뉴진스님 디제잉도, 풍경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서원도 옳다"[디깅 트래블]
안동이 '세계유산'을 지키는 방법
세계유산축전 안동, 봉정사·도산·병산·하회서 25일까지
공연·미디어아트·명상으로 '보는 유산' 넘어 머무는 유산 실험
화려한 콘텐츠보다 강한 건 결국 '그곳에서만 가능한 경험'
봉정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열린 세계유산축전 전야제 DJ 뉴진스님의 공연. 전자음악에 맞춰 무대 양옆에서 불꽃이 솟으며 천년고찰의 밤을 현대적인 공연장으로 바꿔놓았다. 김기훈 작가
회색 승복을 입은 뉴진스님이 디제잉을 시작하자 천년고찰에 전자음이 울렸다. 목탁 대신 비트가 떨어지고, 대형 LED 화면이 오래된 처마를 밝혔다. 스님이라기보다 DJ, 법회라기보다 공연장에 가까운 밤이었다.
세계유산이라는 말 앞에는 어쩐지 '만지지 마시오'라는 팻말 하나쯤 붙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난 9일 막을 올린 '2026 세계유산축전 안동'은 반대로 묻는다. "오래 지키려면, 이제 좀 다르게 써봐도 되지 않겠느냐"고.
도산서원의 중심 강학 공간인 전교당.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선비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으로, 서원의 ‘배움’이라는 본래 기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김기훈 작가
원본보기 아이콘하회마을과 봉정사, 도산서원, 병산서원. 1박2일 동안 네 곳을 이어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보인다. 절에서는 음악을 틀고, 서원에서는 옛 시조를 다시 부르고, 고택에서는 공연을 연다. 밤이 되면 레이저와 조명도 들어온다. '사유의 세계유산, 통섭의 미래가치'라는 조금 어려운 축전의 주제를 현장에서는 훨씬 간단한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다.
세계유산은 어디까지 놀아도 될까. 봉정사는 좋은 시험대다. 봉정사를 포함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세계유산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것은 산사가 지금까지 수행과 신앙, 승려의 일상이 이어지는 '살아 있는 종교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뉴진스님의 디제잉은 시선을 끌지만, 정작 봉정사의 성격과 더 가까운 프로그램은 그 뒤에 있다.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만세루에서 명상하고, 절길을 걸어보는 프로그램이다. 공연은 다른 무대로 옮길 수 있다. 하지만 어둑해진 산사의 마당에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험은 봉정사를 떠나면 복제하기 어려워진다.
도산서원에서 열린 세계유산축전 붓글씨 체험에 참가한 어린이가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한 획씩 글씨를 써 내려가고 있다. 옛 서원의 ‘배움’이 오늘의 체험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김기훈 작가
원본보기 아이콘도산서원으로 가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퇴계 이황이 지은 연시조 '도산십이곡'이 다시 노래가 되고, 아이들은 붓을 잡는다. 미디어극 '도산도'와 야간 프로그램도 이어진다. 하지만 도산서원을 걷다 보면 공연보다 먼저 드는 의문이 있다.
옛사람들은 왜 공부하는 곳을 이렇게 경치 좋은 데 지었을까. 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설명하면서 꼽은 핵심 기능은 공부와 제향,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이다. 산과 물 가까이에 서원을 두고 누각을 열어놓은 것도 풍경 감상이 심신 수양과 공부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길게 열린 누각 사이로 병산과 낙동강 풍경이 스며든다. 자연을 공부와 수양의 일부로 끌어들였던 조선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김기훈 작가
원본보기 아이콘그러니 서원에서 산과 강은 배경이 아니다. 교과서의 일부다. 그 사실은 다음 날 병산서원에 가면 더 분명해진다. 만대루에 올라 기둥 사이를 바라보면 낙동강과 병산이 여러 폭으로 잘려 들어온다. 액자는 있는데 그림은 사람이 그리지 않았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값비싼 그림은 벽에 걸려 있지 않은 셈이다.
병산서원은 이력도 독특하다.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의 구성 요소로 세계유산이 된 데 이어 2019년에는 '한국의 서원' 아홉 곳 중 하나로 다시 이름을 올렸다. 세계유산 '2관왕'이다.
축전에서는 이곳에도 음악회 '풍류병산'과 레이저쇼 '병산이 기억한 평화', 향사 체험을 넣었다. 현대 콘텐츠가 유산에 사람을 불러들이는 효과는 분명하다. 다만 병산서원 앞에서는 조금 역설적인 생각도 든다. 이미 너무 잘 완성된 공간에 무엇을 더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것.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강 하나만 제대로 놓여 있어도 사람은 한참을 앉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하회마을이다. 여기서는 '문화재를 활용한다'는 말부터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누군가에게는 세계유산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늘 아침에도 문을 열고 나와야 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역시 하회의 가치를 양반 고택 몇 채에서만 찾지 않는다. 양반과 평민의 집, 정자와 서원, 산과 강, 그리고 그 안에서 이어져 온 씨족 공동체의 생활이 함께 남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축전은 그래서 고택 안으로 들어간다. 화경당 등 여덟 곳에서 작은 공연과 체험을 열고 어린이들이 직접 세계유산 도슨트로 나선다. 만송정과 부용대 사이에서는 하회선유줄불놀이가 세 차례 열린다. 숯가루가 든 줄에 불을 붙여 낙동강 위로 불꽃을 흩뿌리는 놀이다.
국가무형유산 안동포짜기 이수자이자 경상북도 무형유산 전승교육사인 박순자 씨가 ‘2026 세계유산축전 안동’을 맞아 하회마을에서 전통 베틀로 안동포 짜기를 시연하고 있다. 평소 임하면 금소마을에서 이어온 전통 섬유기술을 축전 현장으로 옮겨와 관람객들에게 직접 선보였다. 김기훈 작가
원본보기 아이콘이 프로그램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새로 만들어낸 볼거리가 아니라는 데 있다. 강이 있어야 하고, 부용대가 있어야 하고, 하회의 밤이어야 한다. 통째로 다른 도시로 가져갈 수 없다.
세계유산축전을 평가하는 기준도 여기쯤 있을 것이다. 얼마나 화려하게 옛것을 현대화했느냐보다, 다른 장소에 옮겨놓아도 성립하는 콘텐츠인가 아닌가. 전자음악과 미디어아트는 문화유산에 처음 온 사람을 불러들이는 좋은 입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장소가 공연의 배경막으로만 남는 순간 세계유산일 이유도 희미해진다.
반대로 도산십이곡을 도산에서 듣고, 병산 만대루에서 강을 보고, 봉정사에서 밤을 보내고, 하회에서 줄불을 보는 경험은 쉽게 이식되지 않는다. 유산이 콘텐츠를 빌리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유산에서 태어난다.
올해 세계유산축전은 가야고분군과 반구천의 암각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에 이어 안동으로 왔다. 그중 안동이 재미있는 것은 한 도시 안에 역사마을과 산사, 서원이 함께 있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법과 수행하는 법, 공부하는 법이 수십km 안에서 만난다.
17일 동안 4곳에서 마련된 공연과 전시, 체험은 그래서 하나의 실험처럼 보인다. 세계유산을 잘 보존한다는 것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유리상자 안에 넣는 일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다시 그곳에 앉고, 듣고, 걷게 만드는 일일까.
병산서원의 입교당. 유생들이 공부하고 강론하던 서원의 중심 공간이다. 열린 대청 너머로 만대루와 낙동강, 병산이 한눈에 이어져 ‘자연 속에서 공부한다’는 조선 서원의 공간 감각을 보여준다. 김기훈 작가
원본보기 아이콘병산서원 만대루에 앉으면 기둥과 기둥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레이저도 LED도 없다. 몇백 년째 같은 자리에서 산과 물이 들어왔다 나간다. 안동의 세계유산을 이틀 동안 돌아보고 나니, 미래의 문화유산에 가장 어려운 기술은 어쩌면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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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세계유산축전 안동'은 오는 25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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