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고전학자·번역가 넘나든 76세 작가
한림원 "고전 전통과 유희적 대화…동시대 문학 새롭게 만들어"
'빨강의 자서전'·'남편의 아름다움'·'녹스' 등 국내 출간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 헤라클레스에게 죽임당한 괴물 게리온, 카툴루스의 애가, 그리고 마릴린 먼로. 2000년 넘게 떨어진 이름들이 앤 카슨의 책에서는 같은 시간에 살아 움직인다. 고전을 박물관에 두는 대신 현재로 불러내고, 시와 소설, 에세이와 비평, 번역의 경계를 허물어온 캐나다 시인 겸 고전학자 앤 카슨(76)이 올해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캐나다 작가 앤 카슨이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Don J. Usner

캐나다 작가 앤 카슨이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Don J. Us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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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림원은 8일 카슨을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고전 전통과 유희적으로 대화하며 동시대 문학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정 이유로 들었다. 상금은 1200만 스웨덴크로나다. 카슨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19번째 여성 작가가 됐다.


짧은 선정 문구에는 카슨 문학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는 고대 작품을 현대어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고전의 조각을 뜯어내고 현대의 욕망과 실연, 젠더와 폭력, 기억과 애도의 문제에 다시 붙였다. 그 과정에서 '시인가 소설인가', '번역인가 창작인가', '학술서인가 문학인가'라는 구분도 번번이 무너뜨렸다.

한림원이 그동안 공개적으로 밝혀온 문학상 심사 핵심 기준도 이 대목과 맞닿는다. 문학적 성취를 최우선에 두되 세계문학의 발전을 이끈 '실험과 발명, 정련'을 중요하게 본다는 것이다. 카슨은 한 장르 안에서 완성도를 높인 작가라기보다 장르 자체의 경계를 계속 옮겨온 작가다. 올해 한림원이 강조한 '새로운 형식'은 그런 40년 작업에 대한 평가로 읽힌다.


출발점에는 시인 사포가 있었다. 195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카슨은 은행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온타리오의 여러 소도시에서 성장했다. 고교 시절 라틴어 교사가 점심시간마다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쳐줬고, 그때 사포를 처음 만났다. 카슨은 훗날 고대 그리스어를 "낯설지만 언제나 반겨주는 항구" 같은 존재로 회고했다.

토론토대에서 고전학을 공부하고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대에서 저명한 고전학자 케네스 도버에게 고대 그리스어를 배웠다. 1981년 토론토대에서 사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고전학을 가르쳤다. 그의 공식 작가 소개가 오랫동안 "캐나다에서 태어났고 생계를 위해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친다"는 한 문장에 가까웠던 것도 카슨답다. 자신의 생애보다 책 자체가 앞에 놓이기를 원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앤 카슨의 첫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Eros the Bittersweet) 영문판 표지. 사포와 플라톤 등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사랑과 욕망, 결핍의 관계를 탐구한 책으로, 고전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카슨 작품세계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Princeton University Press

앤 카슨의 첫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Eros the Bittersweet) 영문판 표지. 사포와 플라톤 등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사랑과 욕망, 결핍의 관계를 탐구한 책으로, 고전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카슨 작품세계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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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1986)은 박사논문에서 출발했다. 사포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문헌을 오가며 사랑과 욕망은 충족이 아니라 '결핍'에서 생겨난다고 탐구했다. 학술 연구인데 시처럼 읽히고, 비평인데 한 편의 문학처럼 움직인다. 훗날 카슨이 계속 밀어붙일 형식적 혼종의 출발점이었다. 국내에는 지난해 황유원 번역으로 출간됐다.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은 1998년 '빨강의 자서전'이다. 기원전 6세기 시인 스테시코로스가 노래한 게리온 신화를 뒤집었다. 원전에서 게리온은 헤라클레스가 열 번째 과업을 수행하며 죽여야 할 괴물이다. 카슨은 카메라를 영웅에게서 괴물에게 돌렸다. 빨간 날개를 가진 소년 게리온이 헤라클레스와 사랑에 빠지고 버림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소설로 다시 썼다. 그것도 '운문소설'이라는 낯선 형식으로였다. 영웅담의 주변부에 있던 괴물은 카슨의 손에서 사랑하고 상처받는 인간이 됐다.


2001년 '남편의 아름다움'에는 부제부터 그의 문학관이 드러난다.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아름답지만 거짓말을 일삼는 남편과의 결혼과 파국을 29개의 탱고로 구성했다. 시와 에세이, 자전적 서사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다. 카슨은 이 작품으로 여성 최초로 영국 T.S. 엘리엇상을 받았다.


고전 번역에서도 카슨은 원전의 '빈자리'를 지우지 않았다. 2002년 'If Not, Winter'에서 사포의 현전하는 시편을 번역하면서 파피루스가 훼손돼 사라진 단어나 행을 대괄호와 공백으로 남겼다. 없는 것을 번역자가 채우는 대신 무엇이 사라졌는지까지 독자에게 보여준 것이다. 결핍을 사랑의 조건으로 바라봤던 첫 책의 문제의식이 번역 방식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국내 번역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를 펼친 모습.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진과 편지, 기억의 파편을 카툴루스의 시 번역과 엮은 작품으로, 긴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상자에 담은 독특한 형식이 특징이다. 봄날의책

국내 번역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를 펼친 모습.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진과 편지, 기억의 파편을 카툴루스의 시 번역과 엮은 작품으로, 긴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상자에 담은 독특한 형식이 특징이다.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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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식 실험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책은 '녹스'다. 1978년 집을 떠나 거의 연락이 끊긴 오빠 마이클이 2000년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난 뒤 만든 애도서다. 카슨은 먼 이국에서 죽은 형제를 애도한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101번 시를 한 단어씩 번역하면서 오빠의 사진과 편지, 우표, 그림과 기억의 조각들을 붙였다. 완성된 책은 일반적인 제본을 버리고 한 장의 긴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상자에 넣었다. 카슨에게 번역은 죽은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 됐다.


국내판 '녹스'도 원서의 물성을 그대로 살렸다. 2022년 1인 출판사 봄날의책이 긴 종이를 손으로 이어 붙여 아코디언 형태로 제작하면서 출판계에서 화제가 됐다. 이어 출간된 '플로트'는 한발 더 나갔다. 시와 산문, 희곡, 비평, 강연록 등 22편을 각각 별개의 소책자로 만들어 PVC 상자에 넣었다. 페이지 순서조차 정해져 있지 않다. 독자가 어느 글을 먼저 꺼내 읽느냐에 따라 '책'의 순서가 달라진다.


고전과 대중문화가 충돌하는 순간도 카슨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2019년 '노마 진 베이커 오브 트로이'에서는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와 마릴린 먼로를 겹쳤다. 트로이전쟁의 원인이 된 미녀 헬레네와 20세기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섹스 심벌 먼로를 한 무대에 올려놓고 남성 중심 서사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욕망의 대상이자 희생양으로 만들어지는지 묻는다.


일흔을 넘어서도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 2024년 내놓은 'Wrong Norma'에는 조지프 콘래드와 플로베르, 관타나모, 눈, 빈곤, 아버지, 토요일 밤까지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소재를 다룬 25편의 산문시와 직접 그린 이미지가 뒤섞였다. 이 책은 전미도서상 시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고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시 부문을 받았다.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시인·고전학자 앤 카슨. 고대 그리스 문학을 바탕으로 시와 소설, 비평, 번역의 경계를 허무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시인·고전학자 앤 카슨. 고대 그리스 문학을 바탕으로 시와 소설, 비평, 번역의 경계를 허무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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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이전의 주요 문학상들도 거의 같은 지점을 봤다. 2020년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심사위원단은 카슨이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해 현재의 복잡성을 읽어내는 혁신적인 시학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이듬해 PEN/나보코프상 심사위원들은 "물려받은 형식과 장르를 거부하고 질문하며 다시 정의해온" 작가이자 고전과 아방가르드를 결합한 작가라고 평했다. 25년 전 그리핀 시문학상 심사에서도 이미 "시집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계속 새롭게 정의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올해 노벨위원회의 '새로운 형식'이라는 표현은 갑자기 등장한 찬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국내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책도 적지 않다. '빨강의 자서전'과 그 후속작 '레드 닥', '남편의 아름다움'이 한겨레출판에서 나왔고, '녹스'와 '플로트'는 봄날의책이 펴냈다. 난다는 최근 '에로스, 달콤씁쓸한'을 비롯해 '짧은 이야기들' 등 카슨의 초기 저작을 잇달아 소개하고 있다.


카슨은 이번 수상으로 한강에 이어 다시 여성 작가에게 돌아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선정 이유에서 한림원이 강조한 것은 성별이나 국적보다 '형식'이었다. 고전이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의 사랑과 상실을 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담기 위해서라면 책과 장르의 모양부터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것. 카슨이 40년간 해온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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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아이슬란드에 있었다. AP통신에 따르면 카슨은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짧게 답했다.


"바람을 듣고 있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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