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이주의 전시는 전국 각지의 전시 중 한 주간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전시를 정리해 소개합니다.

손은영의 ‘푸른 계단 집’. 청록빛 계단과 하늘, 야자수 등 실제 공간의 요소를 낯선 색으로 재구성해 집에 스민 기억과 장소의 정서를 드러낸다. 슈페리어갤러리

손은영의 ‘푸른 계단 집’. 청록빛 계단과 하늘, 야자수 등 실제 공간의 요소를 낯선 색으로 재구성해 집에 스민 기억과 장소의 정서를 드러낸다. 슈페리어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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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영 개인전 '삶이 머무는 이곳, 여기'

집은 사라져도 그곳에서 살았던 시간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손은영은 집과 골목, 담장과 정원을 오래 바라보며 장소에 축적된 기억을 이미지로 옮겨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집은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지난 시간이 겹쳐 있는 정서적 공간이다. 특히 실제 공간을 촬영한 이미지에 적외선 촬영 특유의 색과 질감을 더해, 눈에 익은 주택과 골목을 현실과 상상이 맞닿은 풍경으로 바꾼다. 청록색 계단과 선명한 하늘, 분홍빛 골목처럼 현실에서는 조금 어긋난 색이 오히려 기억 속 장소의 감각에 가까워진다.

손은영의 ‘핑크빛 골목’. 적외선 촬영 특유의 색채로 익숙한 주택과 골목을 현실과 상상이 겹치는 풍경으로 바꿔놓은 작품이다. 슈페리어갤러리

손은영의 ‘핑크빛 골목’. 적외선 촬영 특유의 색채로 익숙한 주택과 골목을 현실과 상상이 겹치는 풍경으로 바꿔놓은 작품이다. 슈페리어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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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으로 시선을 옮기면 기억은 자연의 시간과 포개진다. 어린 시절 우연히 접한 모네의 '수련'에서 시작된 정원에 대한 관심은 계절의 빛과 식물의 변화, 집을 둘러싼 풍경으로 이어졌다. 사진과 회화의 감각을 오가는 손은영의 작업에서 장소는 있는 그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색과 빛, 사물의 배치에 남아 있는 감정을 다시 불러내는 쪽에 가깝다. 무심히 지나던 골목과 창밖 풍경을 한 사람의 생이 잠시 머물렀던 자리로 다시 보게 하는 전시다. 전시는 22일까지, 서울 강남구 슈페리어갤러리.


김태진의 ‘Night, Liquid, Light(밤, 액체, 빛)’. 흘러내리고 충돌하는 색과 선으로 밤과 빛, 유동하는 감각의 잔상을 한 화면에 겹쳐 놓은 회화다. 갤러리 채율

김태진의 ‘Night, Liquid, Light(밤, 액체, 빛)’. 흘러내리고 충돌하는 색과 선으로 밤과 빛, 유동하는 감각의 잔상을 한 화면에 겹쳐 놓은 회화다. 갤러리 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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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정윤영 2인전 'The Places Where'

같은 곳에 도착해도 기억과 감각이 도착하는 속도는 다르다. 사제 관계인 김태진과 정윤영의 2인전 'The Places Where'는 두 작업을 억지로 하나의 주제에 묶는 대신, 서로 다른 이미지가 화면에 도달하는 방식을 나란히 놓는다. 김태진의 화면에서는 별과 바람, 구름과 윤슬처럼 바깥에서 감지한 것들이 안으로 밀려왔다가 잔상으로 물러난다. 정윤영에게는 반대다. 몸이 먼저 겪고 기억한 시간이 화면 뒤편에서 천천히 앞으로 배어 나온다. 두 사람의 신작 30여 점이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서로 다른 속도로 이어진다.

정윤영의 ‘붉은 잎의 사이’. 여러 겹의 실크 위에 수채와 과슈, 아크릴, 피그먼트 파우더를 쌓아 식물을 닮은 형상과 몸의 기억이 천천히 배어 나오는 장면을 만든다. 갤러리 채율

정윤영의 ‘붉은 잎의 사이’. 여러 겹의 실크 위에 수채와 과슈, 아크릴, 피그먼트 파우더를 쌓아 식물을 닮은 형상과 몸의 기억이 천천히 배어 나오는 장면을 만든다. 갤러리 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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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영은 얇은 실크를 여러 겹 포갠 뒤 수채와 과슈, 아크릴과 피그먼트 파우더를 쌓는다. 연약한 한 겹이 반복되며 오히려 단단한 밀도를 얻고, 몸과 식물을 닮은 형상은 나타났다 다시 흐려진다. 영상과 설치를 중심으로 작업해온 김태진은 지난해 드로잉을 거쳐 이번에는 100호가 넘는 대형 회화를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그에게 그림은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 화면이 아니라 머물고, 돌아가고, 다시 발견하는 장소다. 제목의 'where' 뒤에 문장이 비어 있는 것도 그래서다. 무엇이 있었던 곳인지는 관객이 머문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전시는 11월 6일까지, 서울 강남구 갤러리 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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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의 ‘푸른 숲을 뛰어가는 남녀’. 길게 늘어진 나무 사이를 달리는 두 인물과 희미한 초승달을 통해,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푸른 숲’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페이지룸8

윤영호의 ‘푸른 숲을 뛰어가는 남녀’. 길게 늘어진 나무 사이를 달리는 두 인물과 희미한 초승달을 통해,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푸른 숲’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페이지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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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개인전 '우리는 푸른 숲을 향해 나아간다'

숲은 길을 잃는 장소이면서, 다시 길을 찾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윤영호가 말하는 '푸른 숲'은 단테의 '신곡'에서 출발한다. 지옥과 연옥, 천국을 통과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단테의 여정을 현실과 이상, 실체와 환영이 뒤섞인 현대의 풍경으로 옮겼다. 초기 추상 작업에 집중했던 작가는 2020년 무렵 쇼팽의 '녹턴'에서 받은 공감각을 서울의 밤 풍경과 결합하며 구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 전시의 회화 17점은 그렇게 형체를 얻기 시작한 무의식의 풍경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윤영호의 ‘미지의 세계로 다이빙’. 숲과 맞닿은 푸른 수면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인물들을 통해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페이지룸8

윤영호의 ‘미지의 세계로 다이빙’. 숲과 맞닿은 푸른 수면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인물들을 통해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페이지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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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숲은 평화로운 낙원만은 아니다. 불타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며,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뛰거나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두 개의 달과 폭포'에서는 천국과 연옥처럼 분리된 두 세계를 물길이 잇고, '푸른 숲을 뛰어가는 남녀'의 어두운 숲에는 작은 초승달이 희미하게 빛난다. 유채와 아크릴, 먹과 페이스트로 만든 거친 표면과 강한 푸른색은 이 세계가 현실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장소임을 강조한다. 윤영호에게 숲은 완성된 유토피아보다 불안과 희망이 함께 존재하는 미지의 공간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그쪽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일이다. 전시는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페이지룸8.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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