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가갸거겨'가 국경일이 되기까지…한글날 100년을 펼치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 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
말모이·조선말 큰사전·한글 음절표 등 121점…1926년 '가갸날'부터 AI까지
'가갸거겨 고교구규….'
특별전 3부 ‘한글날: 무한이륙’ 전시장. 지난 100년간 축적된 한글날 관련 사진·영상·신문 기록을 살펴보고 관람객 참여로 한글날 축제를 완성하는 디지털 체험을 마련했다. 국립한글박물관
지금 보면 아이가 글자를 처음 배우며 내는 소리 같다. 그런데 100년 전에는 이 두 글자 '가갸'가 지금의 '한글'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글날의 첫 이름 역시 '가갸날'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좀처럼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이 여기서 생긴다. 10월9일 한글날은 언제부터, 어떻게 지금의 한글날이 됐을까.
국립한글박물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2일부터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주제관에서 여는 '일구이륙 무한이륙'은 그 질문을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풀어낸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별전으로, 내년 2월9일까지 한글문화 자료 116건 121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의 '일구이륙'은 첫 가갸날 기념식이 열린 1926년이다. 그 뒤에 '무한이륙'을 붙였다. 100년 전 한글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출발해 앞으로 또 다른 100년을 상상해보자는 뜻이다.
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글이 아니라 '한글날'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10월9일을 한글날로 기념한다는 결과를 먼저 배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이름을 만들고, 날짜를 계산하고, 기념일의 지위를 놓고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다.
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글날 제정 100주년 기념 기획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가 '조선말 큰사전' 원고 등 다양한 원고를 살펴보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함께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한글날과 관련된 한글문화 자료 116건(세부 수량 121점)을 만날 수 있다. 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1926년 조선어연구회는 훈민정음 반포 480돌을 맞아 처음 '가갸날'을 기념했다. 일제강점기였다. 문자 하나를 기념하는 행위가 곧 우리말을 지키는 일이던 때다. '가갸날'은 1928년 '한글날'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날짜 역시 여러 차례 바뀌다가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된 뒤 지금의 10월9일로 자리 잡았다.
1부 '가갸날: 일구이륙'은 이 변화의 시간을 따라간다. 한글날은 광복 이후 공휴일이 됐지만 1990년 관련 규정이 바뀌면서 1991년부터 쉬는 날에서 빠졌다. 이후 국경일 지정 운동을 거쳐 2005년 국경일이 됐고, 2012년 다시 공휴일로 지정돼 2013년부터 '빨간 날'을 되찾았다. 달력의 하루도 저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주시경과 제자들이 1910년대 국어사전 편찬을 위해 작성한 보물 ‘말모이’ 원고의 복제본. 240자 원고지에 붓글씨로 작성됐으며 현재 올림말 ‘ㄱ’부터 ‘걀죽’까지 남아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원본보기 아이콘전시의 진짜 재미는 2부 '낯익은 가갸의 실마리'에서 살아난다. 여기서는 거창한 기념일보다 사람들이 한글을 어떻게 배우고 쓰며 놀았는지가 보인다. 17세기 간행본으로 추정되는 '훈몽자회'에는 '가갸거겨'식 음절 배열이 등장한다. 19세기 한글 음절표에는 글자를 익히기 쉽도록 배열을 만들고 그림이나 생활 지식을 함께 담았다. '가갸'가 한글의 별칭이 된 이유다.
글자는 교과서에만 머물지 않았다. '가'에서 '워'까지 음절 18개를 둥글게 배치해 직업이나 이사, 시험 운수를 점친 책도 있다. 노랫말이 됐고 놀이가 됐고 신문 속 우스갯말에도 들어갔다. 한글이 살아남은 이유를 문자 체계의 과학성만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들이 매일 쓰고 갖고 놀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곁에는 글자를 지켜낸 사람들의 흔적이 놓인다. 주시경과 제자들이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작성한 보물 '말모이' 원고의 복제본,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 창간호, 조선어학회가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작성한 보물 '조선말 큰사전' 원고 등이 이어진다.
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 2부 ‘낯익은 가갸의 실마리’에 전시된 조선어강습원 수업증서. 주시경이 강사로 활동했던 조선어강습원에서 발급한 자료로, 국어학자 최현배가 받은 수업증서 등도 함께 소개된다. 국립한글박물관
원본보기 아이콘'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가진 사연은 한 편의 영화에 가깝다.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 과정에서 경찰에 압수돼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광복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됐다. 되찾은 원고가 있었기에 우리말 사전 편찬도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유리장 안 빛바랜 종이에서 한글의 역사가 갑자기 생존의 역사로 바뀌는 순간이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가 조선어강습원에서 공부하며 받은 '익힘에 주는 글'과 '마친 보람' 등 수업증서도 눈길을 끈다. '마친 보람'에는 오늘날 익숙한 '한글'이라는 단어가 자음과 모음을 가로로 풀어쓴 형태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한글이라는 이름이 아직 완전히 굳어지기 전, 새로운 문자 이름이 사람들의 손에서 형태를 얻어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전시가 흥미로운 것은 '한글은 위대하다'는 결론부터 들이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글이라는 문자가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문자를 배우고 이름 붙이고 지키고 기념해 온 과정을 보여준다. 왕이 만든 문자에서 국민이 지켜낸 문화로 시선이 이동한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 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의 체험 공간 ‘빛나는 한글날’. 관람객이 옛 달력을 조명판 위에 올려 과거 달력 속에 표시된 한글날을 직접 찾아볼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원본보기 아이콘마지막 3부 '한글날: 무한이륙'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1926년 이후 한글날의 사진과 영상, 신문기사를 디지털로 살펴보고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한글날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미래에 전하고 싶은 단어와 사람, 시점을 고르면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최대 100년 뒤의 답변을 만들어주는 '한글로 이어질 미래에게'도 마련됐다.
앞선 두 공간이 오래된 종이와 잉크의 무게로 한글을 보여줬다면 끝부분은 체험 쪽으로 성큼 이동한다. 기록물의 힘에 비하면 다소 가벼워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전시를 '지켜낸 한글'이라는 과거형으로 끝내지 않고 앞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쓰고 바꿔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제목의 '무한이륙'과 맞닿는다.
조선어학회가 1932년 펴낸 기관지 ‘한글’ 창간호. 우리 말글에 관한 연구와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글 등을 실으며 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기여했다. 국립한글박물관
원본보기 아이콘100년 전 가갸날을 만든 사람들은 한 세기 뒤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한글을 입력하고 AI와 한글로 대화하는 풍경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2026년의 우리는 한글날이 원래부터 10월9일이었고 언제나 공휴일이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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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전시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첨단 AI 체험보다 낡은 음절표 한 장일지도 모른다. '가갸거겨'부터 시작한 그 작은 표 안에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글을 지킨 사람과 그것을 다음 세대로 건넨 시간이 겹쳐 있다. 한글날의 100년은 결국 글자의 역사가 아니라 그 글자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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