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책]질주하는 세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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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장부

회계감사는 숫자가 아니라 의심을 세는 일인지도 모른다. 6년 만에 시험에 붙은 늦깎이 신입 회계사 유한수에게 첫 감사가 떨어진다. 상대는 상장을 앞둔 라면 회사, 공교롭게도 그가 수험생활 내내 저녁으로 먹던 라면을 만드는 곳이다. 장부는 매끈하고 서류는 빈틈없으며 회사 사람들도 친절하다. 그런데 영하 20도의 냉동창고에서 직접 세어본 박스, 끝내 돌아오지 않는 조회서 세 통, 결재 흔적 없는 지출처럼 작은 어긋남이 하나씩 눈에 걸린다. 현직 공인회계사이자 회계법인 파트너인 손보승은 자신의 첫 감사 시즌을 밑그림 삼아 9월의 계획부터 4월의 마무리까지 실제 감사 절차를 4부 26화의 오피스 미스터리로 바꿨다.


재미있는 것은 회계 지식이 추리의 장식이 아니라 추리 자체가 된다는 점이다. '회수가능액', '이면약정', '부채비율 200%', '1 row returned', '서명할 수 없는 문장' 같은 제목을 따라가다 보면 재고실사와 채권조회, 감사인의 독립성이 단서가 되고, 숫자가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사실마저 의심의 이유가 된다. 저자는 감사를 매년 둑을 두드려 보는 일에 비유한다. 무너지지 않은 둑은 뉴스가 되지 않지만, 누군가 계속 두드리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와 거래처, 직원이 그 아래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직 소설의 맛도 바로 거기에 있다. 회계사를 영웅으로 치켜세우기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노동의 긴장을 보여준다. (손보승 지음ㅣ한국세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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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메시지가 살아남는다

말을 많이 하면 틀릴 확률은 줄어들지 몰라도, 기억될 확률도 함께 줄어든다. 스기노 미키토는 신입 컨설턴트 시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라는 지적을 수없이 들었던 경험에서 출발해, 복잡한 생각을 '1 메시지'로 압축하는 법을 정리한다. 콘서트장이나 술집에서는 목소리보다 잡음이 커지면 말이 묻힌다. 저자는 통신공학의 S/N비를 끌어와, 설명과 수식어가 많아질수록 핵심이라는 신호가 잡음 속에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짧게 말하는 재주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고 무엇 하나를 남길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방법도 의외로 구체적이다. '점'에서는 논점을 하나로 좁히고, '선'에서는 반론과 반증이 가능한 수준까지 답을 날카롭게 만들며, '면'에서는 추상어 대신 작은 말과 숫자, 상대가 실제로 쓰는 언어로 메시지를 결정화한다. "경영에 문제가 있다" 같은 누구도 틀렸다고 할 수 없는 문장을 저자가 '점괘 같은 말'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정확하다. 틀릴 위험을 피하려는 말은 대체로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 프레젠테이션도 '1 프레젠테이션, 1 메시지'를 원칙으로 삼고, 여러 슬라이드는 그 한 문장을 향해 가는 한 편의 연극처럼 짜라고 한다. 결국 단순함은 말솜씨보다 책임의 문제다. 한 문장을 고른다는 것은, 그 문장에 자기 판단을 걸겠다는 뜻이니까. (스기노 미키토 지음ㅣ김양희 옮김ㅣ동양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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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세계

우리는 역사상 가장 빠른 시대에 산다고 믿는다. 바츨라프 스밀은 그 상식을 숫자부터 다시 잰다. 지각판의 움직임과 생명의 성장·번식에서 치타와 말, 인간의 달리기, 곡물 생산과 돛단배, 증기기관과 내연기관, 산업 생산과 무어의 법칙까지 '속도' 하나를 축으로 지구사와 문명사를 관통한다. 여기서 속도는 두 종류다.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물리적 속도와, GDP 성장이나 인구 증가처럼 일정 시간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는 변화율이다. 두 개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이 가속한다고 말해온 우리의 언어부터 스밀은 의심한다.


20세기 초의 가속은 실제로 눈부셨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은 시속 16㎞ 남짓이었지만 반세기 뒤 보잉 707은 시속 890㎞로 대서양을 건넜다. 문제는 그 이후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실질 이동속도는 수십 년째 크게 빨라지지 않았고, 교통체증과 공항 대기까지 포함하면 '문에서 문까지' 걸리는 시간은 오히려 늘어난 경우도 있다. 집안일 역시 전자레인지와 진공청소기가 있다고 해서 40년 전보다 계속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밀은 화성행 로켓이나 초고속 이동 같은 미래 산업의 과장에도 특유의 냉소를 보낸다. 이 책이 속도를 예찬하지 않는 이유다. 더 빨라졌다는 감각과 실제로 빨라진 세계 사이에는 꽤 큰 간격이 있다. 가속을 진보와 동의어로 써온 시대에, 브레이크가 아니라 속도계를 먼저 보라고 권하는 책이다. (바츨라프 스밀 지음ㅣ이한음 옮김ㅣ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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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IP

K-콘텐츠가 세계를 휩쓸었다는 말 뒤에는 늘 빠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래서 그 성공은 누구의 자산이 되었는가. 윤송이는 『오징어 게임』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계약,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소니 제작과 넷플릭스 유통 구조, 월트디즈니가 한 세기에 걸쳐 IP를 축적해온 방식까지 끌어와 '잘 만드는 능력'과 '남기는 능력'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본다. 제작사는 작품을 만들고 플랫폼은 유통을 맡는다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다. 속편·스핀오프·캐릭터·게임·광고·굿즈로 뻗어나갈 미래의 권리를 누가 쥐느냐에 따라, 같은 흥행도 전혀 다른 대차대조표를 남긴다.


흥미로운 것은 IP를 법률 용어나 계약 기술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웹툰·웹소설과 세계관, 포맷 IP, 포토카드와 팬덤의 '소유 욕망', 『흑백요리사』를 둘러싼 방송 규제, 방송 아카이브를 AI 학습 데이터로 쓸 때의 권리 문제까지 따라가다 보면 콘텐츠 산업의 승패가 창작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콘텐츠는 비용이고 IP는 자산"이라는 책의 명제는 다소 회계적으로 들리지만, 지금 K-콘텐츠에 필요한 불편한 교정이기도 하다. 다만 창작의 가치를 너무 쉽게 권리와 수익의 언어로 환산하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이 이야기를 잘 만드는 나라'를 넘어 '그 이야기의 주인이 되는 나라'가 되려면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지 묻는다는 점에서 문제 제기는 정확하다. (윤송이 지음ㅣ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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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감각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약 43만 점의 유물이 있지만 전시장에 나오는 것은 만 점 남짓이다. 김미경은 그 거대한 수장고를 수천 년에 걸쳐 선별된 하나의 '편집숍'처럼 바라본다.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취객선비 변색 잔, 까치호랑이 배지, 국새 키링이 나온 출발점도 유물의 외형을 예쁘게 복제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미 완결된 아름다움을 가진 유물에서 지금 사람에게 곧장 닿을 하나의 핵심을 골라내고, 그것을 책상 위 오브제나 이어폰 케이스, 무선 충전기 같은 오늘의 쓰임으로 번역하는 일. 25년차 마케터가 말하는 '감각'은 결국 유행을 빨리 좇는 능력보다 본질과 취향이 만나는 지점을 알아보는 눈에 가깝다.


그래서 '오늘의 감각'에서 더 재미있는 것은 히트상품의 성공담보다 그 앞의 망설임이다. 상품화 직전 폐기한 아이디어, 내부에서 의견이 갈린 사례, 유머와 재해석을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두고 고민한 흔적이 '전통을 현대화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실제 기획의 문제로 바꾼다. 공공기관의 문화유산은 함부로 변형할 수 없지만, 보존만 외치면 사람의 일상에서 멀어진다. 김미경은 그 사이에서 "유물의 형태보다 본질을 먼저 이해할 것"이라는 기준을 세운다. 잘 팔리는 굿즈를 만든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끝에서는 창작자·장인·기업·박물관이 함께 오래갈 시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시선이 넓어진다. 뮷즈의 성공보다 더 오래 남는 대목은,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는 새로움보다 존중이 먼저라는 역설이다.  (김미경 지음ㅣ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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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자신은 마음껏 배신하면서 타인의 배신은 견디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부유한 귀족 툴리오 에르밀은 아내 줄리아나를 두고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것을 자유로운 삶이라 믿는다. 심지어 상처 입은 아내에게 부부가 아닌 남매 같은 관계를 요구한다. 그러다 줄리아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가 신봉해온 자유는 순식간에 소유욕으로 변한다. 1892년 발표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순수'는 사건보다 그 모순을 스스로 합리화하는 한 인간의 머릿속에 오래 머무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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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리오는 자신의 배신을 기억하며 아내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끊임없이 되뇌지만, 그 반성은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교한 자기기만이 되어 갓 태어난 무고한 아이를 자신과 줄리아나가 '잃어버린 천국'으로 돌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 바꿔버린다. 단눈치오가 탐미주의의 감각성과 도스토옙스키식 범죄 심리를 겹쳐놓은 지점이 여기다. 화자는 광기에 휩쓸렸다고 변명할 수도 없을 만큼 명료하게 자신의 범죄를 생각하고 준비한다. 그래서 제목의 '순수'는 아름다운 상태라기보다 누군가가 독점하려 할 때 얼마나 폭력적인 관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반어처럼 읽힌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범죄를 사상으로 정당화했다면, 툴리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 차이가 이 오래된 소설을 지금 읽어도 불편하게 만든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지음ㅣ이현경 옮김ㅣ민음사)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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