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AI 딸깍의 시대, 차이를 만드는 건 결국 인간
정유진 'AI 시대에 예술을 해도 될까요?'
예술 작업에 대한 고민과 나아갈 길 담아
교육자이자 전시 기획자인 정유진 오티스예술디자인대학 국제입학처 부처장이 쓴 'AI 시대에 예술을 해도 될까요?'는 제목부터 무거운 질문이다. 딸깍하면 그림이 나오는 시대,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생에 걸쳐 완성한 화풍을 1분 안에 재현하는 시대에서 예술의 가치와 창작자의 역할은 흔들리고 있다.
한 학부모가 저자에게 던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살아온 삶과 일을 돌이켜 보고 분석했다. 또 여러 명의 크리에이터들을 인터뷰했다. 이를 통해 AI는 피할 수 없는, 오히려 잘 활용해야 하는 도구라는 것, 우리의 직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업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결론 낸다. 그가 인터뷰한 아티스트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최종 통제권은 결국 사람에게 있고 우리는 이제 만드는 일이 아닌 선택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여기에 '결'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오리지널리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후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본인의 삶을 떠올리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선의 느낌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경험으로 인해 생긴 '결'이 AI와 차별화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며 그 '결'을 반영한다면 AI 시대에도 예술은 유용할 것이라 판단한다.
대학 시절 나는 학업에 큰 뜻이 없는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전공 수업을 지겨워했다. 그렇다고 장학금도 못 타는 주제에 교양 수업이나 듣고 있자니 집에 죄스러워서 타과 전공 수업을 찾아다녔다. 영화과, 국문과, 문창과, 영문과, 철학과 등등. 때로는 타 학과 학생이라고 쫓겨나기도 하고 주목도 받으며 교양 과목과는 다른 깊이의 수업을 경험했다. 그때의 경험이 세상만사에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탐닉하는 지금의 습관으로 이어졌다.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능인데, '결'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나의 20대는 이제야 조금 쓸모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현실은 더 차가울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AI 시대의 변화에 관한 얘기들은 대부분 작가 등 생산자의 입장이다. 작품에는 두 가지 주체가 더 있다. 투자자와 소비자이다.
결정권을 가진 투자자 혹은 고용인들에게 비용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적은 비용으로 양산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콘텐츠와 보다 큰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인간의 고유성이 담긴 콘텐츠 사이에서 후자를 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AI라는 도구의 특성도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AI를 직접 써보면 80~90%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은 빠르지만, 나머지 10~20%를 채우는 반복 작업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이때 투입되는 AI 사용 비용도 상당하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나머지 10~20%를 채우지 않는 게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소비자 측면으로 보자. 당장은 AI 콘텐츠 홍수 때문에 AI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지만 더욱 발전한다면? AI가 내놓는 결과물이 80~90%에 이르러,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작품과 양산된 작품의 차이가 100대 50이 아니라 100대 80, 100대 90이 된다면 소비자들은 그때도 기꺼이 그 차이에 비용을 지불할까.
그래서 책에 소개된 문제의식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게 된다. AI 도구가 빠르게 결과물을 뽑아 주면, 어느 순간 결정권자는 그게 '다 된 것'이라고 본다. '괜찮은 수준'과 '탁월한 수준'의 차이가 눈에 안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 잘 만들려는 동기 자체가 사라진다. AI의 등장으로 더 좋은 것, 더 밀도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반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광고 에이전시의 모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말했다. "어느 순간 위에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정도면 됐어.' 저는 그게 AI의 가장 큰 위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기준을 낮추게 되는 거잖아요."
바라던 대로 인간은 '오리지널리티'가 강조된 일을 하고 기꺼이 그 차이를 소비하고 투자하는 세상이 된다면 걱정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결', 곧 고유성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도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지워지지 않는다. AI 시대에도 예술을 해도 된다는 희망과, '이 정도면 됐어'가 표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함께 남는다. 지금 세상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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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예술을 해도 될까요? | 정유진 지음 | 부키 | 288쪽 |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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