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창원조각비엔날레 30일 개막…74팀 81명·200여점
성산아트홀에서 100년 진해역·마산어시장까지 도시 전체가 전시장
조혜정 감독 "공명은 같음 아닌 차이에서 시작…조각은 관계 맺는 사건"

가는 실로 뜬 거대한 그물이 한옥 누각의 천장 아래로 축 처졌다. 바람은 구멍 사이로 빠져나가고, 햇빛은 실 사이를 통과해 마루에 내려앉았다. 손으로 한 코씩 떠 올렸지만 조소희의 '…어디…'가 만드는 것은 덩어리보다 빈자리다. 작가는 이 일을 '공백을 짜는 일'이라 부른다. 전통 누각 안에서 실은 공간을 채우지 않고 오히려 비워낸다.


마날 알도와얀 '내 말을 들어줘'. 창원의집 누각에 설치된 마날 알도와얀의 '내 말을 들어줘'(2026). 황동으로 만든 세 개의 입술을 두드리면 금속의 울림이 한옥 안으로 번지며 말하기와 듣기, 침묵과 응답의 관계를 묻는다. 김희윤 기자

마날 알도와얀 '내 말을 들어줘'. 창원의집 누각에 설치된 마날 알도와얀의 '내 말을 들어줘'(2026). 황동으로 만든 세 개의 입술을 두드리면 금속의 울림이 한옥 안으로 번지며 말하기와 듣기, 침묵과 응답의 관계를 묻는다. 김희윤 기자

AD
원본보기 아이콘

조금 떨어진 창원의집에서는 황동으로 만든 입술 세 개가 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작가 마날 알도와얀의 신작 '내 말을 들어줘'다. 작품 제목은 아랍어 '이스마니(Is-Ma-Ni)', "내 말을 들어달라"는 뜻이다. 한국 전통 금속 타악기에서 착안한 속 빈 입술을 두드리면 금속음이 누각 안으로 퍼진다.

말하는 입이 동시에 울림통이 되고, 관객은 듣는 사람인 동시에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 이번 비엔날레가 내건 '공명장(Resonance Field)'이라는 제목이 가장 직접적으로 몸에 와닿는 순간이다. 보도자료 역시 작품이 발화와 침묵, 말하기와 듣기의 관계를 묻는다고 설명한다.


조소희 '…어디…' 창원역사민속관 누각에 설치된 조소희의 '…어디…'(2020). 가는 실을 코바늘로 이어 거대한 원을 만들었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지 않고 빛과 바람, 시선이 드나드는 여백을 남겼다. 김희윤 기자

조소희 '…어디…' 창원역사민속관 누각에 설치된 조소희의 '…어디…'(2020). 가는 실을 코바늘로 이어 거대한 원을 만들었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지 않고 빛과 바람, 시선이 드나드는 여백을 남겼다.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제8회 창원조각비엔날레가 30일 개막한다. 11월15일까지 47일간 세계 41개 도시·지역에서 온 74개 팀 81명의 작가가 200여점을 선보인다. 성산아트홀에 전시를 가두지 않았다. 창원의집과 창원역사민속관, 진해역 일대, 마산어시장까지 창원·진해·마산의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하나의 동선으로 잇는다.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외국인 감독과 공동예술감독 체제로 열리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의 조혜정과 중국의 장쥔이 함께 지휘한다.

29일 언론공개회에서 조혜정 공동예술감독은 이번 전시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공명은 같음이 아니라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조혜정 공동예술감독. 조혜정 2026 창원조각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이 29일 언론공개회에서 전시 주제 '공명장'을 설명하고 있다. 조 감독은 “공명은 같음이 아니라 차이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김희윤 기자

조혜정 공동예술감독. 조혜정 2026 창원조각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이 29일 언론공개회에서 전시 주제 '공명장'을 설명하고 있다. 조 감독은 “공명은 같음이 아니라 차이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포스터의 여러 색도 그래서 섞이지 않는다. 전통 오방색에서 출발한 색들이 자기 색을 유지한 채 맞붙는다. 조 감독은 이를 "서로 다른 시간과 정체성이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지금의 창원"에 빗댔다. 한·중 큐레이터 네 명이 함께 전시를 만드는 과정도 매끈하지만은 않았다. "서로 다른 배경과 언어,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답으로 수렴하지 않고 각자의 관점을 유지한 채 전시를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공명장'이 이야기하는 공명의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공명은 사이좋게 어울린다는 말과 조금 다르다. 조 감독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차이를 지닌 채 기꺼이 만나고, 서로의 개입으로 자신이 달라질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미리 골라주고 묻기도 전에 답을 내놓는 시대에 오히려 낯선 존재와 한 공간에 머물며 영향을 주고받을 기회가 줄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파트리시아 페레즈 유스타키오 설치작품. 필리핀 작가 파트리시아 페레즈 유스타키오의 설치작품. 아바카 섬유와 식민지 시대 이미지 등을 겹쳐 물질 속에 남은 교역과 식민의 기억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펼쳐 보인다.

파트리시아 페레즈 유스타키오 설치작품. 필리핀 작가 파트리시아 페레즈 유스타키오의 설치작품. 아바카 섬유와 식민지 시대 이미지 등을 겹쳐 물질 속에 남은 교역과 식민의 기억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펼쳐 보인다.

원본보기 아이콘

그래서 매체가 조각이다. 조 감독의 설명은 이 대목에서 추상론보다 몸의 이야기로 내려온다. "조각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행동을 멈춥니다. 주변을 돌고, 자신의 몸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고 조절하게 되죠."


무게를 지니고 실제 공간을 차지하는 조각은 스마트폰 화면처럼 손가락으로 밀어내 버릴 수 없다. 다른 물체와 같은 공간을 나눠 써야 한다. 조 감독은 바로 이 "다른 존재와 같은 공간에 머물며 관계를 맺는 물질적 경험"에서 공명의 가능성을 찾았다고 했다.


성산아트홀에서는 그 정의가 꽤 넓어진다. 정다의 '생리적 반응 3: 창원 프로젝트'는 창원 세 곳의 바람을 센서로 측정해 전시장 안의 소리로 바꾼다.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이 데이터가 되고 다시 소리가 된다.


반대편에서는 페드로 레이예스의 거대한 '핵무기 제로'가 관람객을 막아선다. 버섯구름이라는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형상을 전시장 한가운데 끌어들여 핵 위협을 몸의 크기로 마주하게 한다. 이날 조 감독은 "본전시에서 조각은 완결된 물체라기보다 물질과 신체, 작품과 장소가 만나 서로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정상섭의 '반복적 딜레마-윗드럭'(2026). 같은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이 반복되는 군상을 통해 사회의 규율과 명령이 개인의 몸을 어떻게 정렬하는지 드러낸다. 김희윤 기자

정상섭의 '반복적 딜레마-윗드럭'(2026). 같은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이 반복되는 군상을 통해 사회의 규율과 명령이 개인의 몸을 어떻게 정렬하는지 드러낸다.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벽에는 정상섭의 '반복적 딜레마-윗드럭'이 푸른 행렬을 만들었다. 거의 똑같은 제복 차림의 인물들이 같은 몸짓을 되풀이한다. 사람의 얼굴과 자세가 사회의 규칙 속에서 어떻게 학습되고 정렬되는지를 반복 이미지로 밀어붙인 작품이다. 옆 전시장에서는 백인곤의 인물 조각이 나무결처럼 겹겹이 잘리고 이어진다.


작가는 물과 바람이 지나간 뒤 남기는 흔적처럼 기억 역시 사라지면서 동시에 몸 안에 쌓인다고 본다. 이번 전시가 말하는 '공명'이 반드시 따뜻한 화음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조혜정 감독이 단독 기획한 특별전 '조각 이전의 조각'은 한발 더 거슬러 올라간다. "조각이 원래 우리의 삶의 일부였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돌을 깎고, 나무를 다듬고, 물질을 묶고 쌓으며 인간은 무언가를 기원하고 기억했다.


미술관과 '조각'이라는 장르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이미 조각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김윤신, 심문섭, 박석원, 마더성, 잔왕, 주밍 등의 작품을 '깎기·비우기·묶기·쌓기' 같은 행위를 통해 다시 읽는다.

왕궈젠 '수경선상 박물관' 연작. 중국 작가 왕궈젠의 '수경선상 박물관' 연작. 전통 옻칠과 관상, 종교·민간신앙의 가면 이미지를 하나의 얼굴에 겹쳐 정체성과 기억의 여러 층위를 드러낸다. 김희윤 기자

왕궈젠 '수경선상 박물관' 연작. 중국 작가 왕궈젠의 '수경선상 박물관' 연작. 전통 옻칠과 관상, 종교·민간신앙의 가면 이미지를 하나의 얼굴에 겹쳐 정체성과 기억의 여러 층위를 드러낸다.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전시가 성산아트홀 밖으로 나가면서 이번 기획의 성격은 더 분명해진다. 진해역은 올해 건립 100년을 맞았다. 1926년 세워진 옛 역사는 이번 비엔날레를 계기로 전시장으로 다시 쓰인다. 심문섭은 배의 형상을 나전과 옻칠로 만든 신작 '반추'를 놓았고, 김수자는 철길의 선형 구조에서 출발한 '연역적 오브제-더 그리드'를 제작했다.


벽돌을 반복해 쌓은 덩어리들이 오래된 선로를 따라 놓이면서 조각과 철길이 서로의 리듬을 끌어낸다. 조 감독은 "진해가 이토록 매력적인 장소인데도 역대 비엔날레에서 본격적인 전시장으로 쓰이지 않았다"며 "이번에는 처음으로 중요한 전시 장소로 택했다"고 설명했다.

심문섭의 '반추'(2026). 자개 상감과 옻칠로 마감한 배 형상의 조각을 100년 된 진해역에 놓아, 바다의 기억과 수많은 이동·이별의 시간을 한 공간에 겹쳐냈다.  창원조각비엔날레

심문섭의 '반추'(2026). 자개 상감과 옻칠로 마감한 배 형상의 조각을 100년 된 진해역에 놓아, 바다의 기억과 수많은 이동·이별의 시간을 한 공간에 겹쳐냈다. 창원조각비엔날레

원본보기 아이콘

마산어시장에서는 유수진이 통조림 약 1000개로 작은 도시를 만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창원 거주 외국인의 국적별 인구 비율을 통조림 숫자로 옮긴 작품이다. 그러나 이 통계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관객이 하나씩 가져가고 다시 채우면 처음의 비율은 흐트러진다. 숫자로 나뉘어 있던 사람들이 실제 도시에서는 끊임없이 섞인다는 사실을 조각의 변화로 보여준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하나의 정답을 보여주는 중심 작품이 없다. 오히려 그 점을 기획의 원리로 삼았다. 조 감독은 "전시장 안에는 단순히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조각이 아니라 관객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장소를 다시 보게 하며, 익숙해서 지나쳤던 문제와 감각을 새로 마주하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고 부연했다.

AD

성산아트홀에서 시작해 오래된 한옥의 누각을 지나 100년 된 철도역과 시장까지 걸어가야 비로소 전시의 윤곽이 잡히는 이유다. 조각을 보러 도시로 나갔다가, 어느 순간 도시 자체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 '공명장'이 노리는 울림은 아마 그 사이에 있다.


창원=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