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이주의 전시는 전국 각지의 전시 중 한 주간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전시를 정리해 소개합니다.
정성준의 ‘A Romantic View’. 침수된 자유의 여신상과 녹아가는 얼음, 작은 배에 오른 동물들을 통해 기후위기 속 인간 문명의 불안정한 현재와 공존의 가능성을 그린 작품이다. 아뜰리에 아키

정성준의 ‘A Romantic View’. 침수된 자유의 여신상과 녹아가는 얼음, 작은 배에 오른 동물들을 통해 기후위기 속 인간 문명의 불안정한 현재와 공존의 가능성을 그린 작품이다. 아뜰리에 아키

AD
원본보기 아이콘

정성준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내일은 도착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움직일 때 생기는 방향에 가깝다. 정성준의 화면에서는 북극곰과 황제펭귄, 레서판다와 여우원숭이가 트램을 타고 배를 몰며 인간과 같은 도시를 통과한다. 이전 작업에서 이들이 자신들을 받아줄 유토피아를 찾아 떠났다면, 이번에는 인간과 함께 다음 시간을 만들어가는 동행자로 바뀐다. 기후재난을 폐허나 공포의 이미지로 직접 재현하는 대신, 이미 닥친 위기 속에서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 방식이다. 신작 15점 가운데 가로 약 3m의 대작 'A Romantic View'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정성준의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동물과 인간이 함께 도시의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에 소비문화의 기호를 겹쳐, 자연과 문명이 맺는 관계를 우화적으로 풀어냈다. 아뜰리에 아키

정성준의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동물과 인간이 함께 도시의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에 소비문화의 기호를 겹쳐, 자연과 문명이 맺는 관계를 우화적으로 풀어냈다. 아뜰리에 아키

원본보기 아이콘

어두운 바다 위 작은 배에는 동물들이 흩어져 있고, 녹아가는 얼음 사이로 자유의 여신상이 홀로 서 있다. 한때 자유와 진보의 상징이던 기념비가 침수된 풍경 속에 놓이면서 인간 문명의 자신감도 흔들린다. 그런데 그림 속 동물들은 절망에만 머물지 않는다. 얼음을 옮기고 서로를 돕고, 때로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계속 길을 간다. 스타벅스와 나이키 같은 소비문화의 기호까지 뒤섞인 익숙한 도시 풍경은 그래서 조금 우스우면서도 불편하다. 정성준이 말하는 공존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마지막 얼음이 남아 있을 때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전시는 10월 17일까지, 서울 성동구 아뜰리에 아키.

오윤의 ‘탈춤’(1973). 탈춤의 과장된 몸짓과 흥을 거친 선과 강한 흑백 대비로 새겨, 민중의 생명력과 공동체적 에너지를 화면에 끌어올린 작품이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오윤의 ‘탈춤’(1973). 탈춤의 과장된 몸짓과 흥을 거친 선과 강한 흑백 대비로 새겨, 민중의 생명력과 공동체적 에너지를 화면에 끌어올린 작품이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원본보기 아이콘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새김에서 각인으로: 1946?1986, 오윤의 궤적'

칼이 나무를 파고 지나간 자국은 40년 뒤에도 좀처럼 무뎌지지 않는다. 오윤이 남긴 판화 187종을 한자리에 모은 전작전이다. 생전에 직접 찍은 판화와 유족이 원판으로 찍은 사후 판화를 아우른다. 1986년 5월 열린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칼노래'의 표제작 '칼노래'부터 춤추는 호랑이를 새긴 '무호도', 웅크린 노동자의 몸을 담은 '피로', 장을 보러 가는 '할머니' 연작까지, 익숙한 도판으로 보아온 작품을 실제 종이의 눌림과 칼자국으로 만난다. 그해 7월 오윤은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새김에서 각인으로: 19461986, 오윤의 궤적’ 전시 전경. 오윤이 남긴 판화 187종을 생전 판화와 유족의 후쇄 판화까지 아울러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새김에서 각인으로: 19461986, 오윤의 궤적’ 전시 전경. 오윤이 남긴 판화 187종을 생전 판화와 유족의 후쇄 판화까지 아울러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원본보기 아이콘

오윤에게 판화는 하나뿐인 작품을 만드는 기술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미지를 건네는 방법이었다. 작품에 에디션 번호를 매기지 않은 것도 희소성보다 복제와 공유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미술관보다 먼저 책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초판 표지를 장식한 판화 역시 이번 전시에 나온다. 노동자와 농민, 탈과 호랑이, 춤추고 일하고 지친 몸을 거친 선으로 새긴 화면은 1980년대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판화를 '찍어낼수록 소통의 길이 넓어진다'고 믿었던 작가의 태도까지 함께 보면, 왜 이 그림들이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았는지도 선명해진다. 전시는 10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덕아트갤러리.

AD

권용래의 ‘Light in Light-Blue’. 캔버스 위에 수많은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을 쌓아 빛이 반사되고 흩어지는 순간을 푸른색의 일렁이는 형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갤러리조은

권용래의 ‘Light in Light-Blue’. 캔버스 위에 수많은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을 쌓아 빛이 반사되고 흩어지는 순간을 푸른색의 일렁이는 형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갤러리조은

원본보기 아이콘

권용래 개인전 'BECOMING'

금속은 빛을 받는 순간 그림이 된다. 권용래는 레이저로 자른 스테인리스스틸 조각을 하나씩 두드려 미세한 굴곡을 만들고 안료를 입힌 뒤, 젯소칠한 캔버스 위에 수백에서 수천 개씩 붙인다. 차갑고 단단한 재료인데도 화면은 관람자가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고 색을 바꾼다. 이번 개인전 'BECOMING'은 빛과 금속의 관계를 오래 탐구해온 작가가 회화와 조각, 설치의 경계를 오가며 완성한 신작 16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도 고정된 결과보다 계속 '되어가는'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권용래의 ‘Light in Light-Golden’. 두드려 굴곡을 만든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사이로 빛이 번지며, 보는 위치에 따라 황금빛 형상이 끊임없이 달라지는 작품이다. 갤러리조은

권용래의 ‘Light in Light-Golden’. 두드려 굴곡을 만든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사이로 빛이 번지며, 보는 위치에 따라 황금빛 형상이 끊임없이 달라지는 작품이다. 갤러리조은

원본보기 아이콘

대표작 'Eternal Flame'에서는 작은 금속 유닛 사이로 번지고 반사되는 빛이 한순간 솟아오른 불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해진 불꽃의 형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는 위치와 조명의 각도에 따라 금속 표면의 밝기와 그림자가 달라지면서 이미지가 생겼다가 사라진다. 권용래에게 빛은 작품을 비추는 외부 조건이 아니라 작품을 끝내 완성하는 재료인 셈이다. 같은 조각을 반복해 붙이는 노동 역시 실제로는 망치의 힘과 각도, 유닛의 간격이 매번 달라지는 미세한 변주의 과정이다. 변하지 않는 금속에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장면을 만들어내며, 회화가 과연 어디까지 평면일 수 있는지 묻는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서울 용산구 갤러리조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