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를 묻는 질문이 변화의 첫걸음
드러난 숫자는 묵힌 '문제'를 경영진이 답해야 할 '과제'로
투명한 숫자가 여는 양성평등·저출생 해법

[초동시각]"우리 회사 순위가 왜 떨어졌나요"라는 전화가 반가운 이유
AD
원본보기 아이콘

"우리 회사 순위가 왜 떨어졌나요." 최근 아시아양성평등지수 기획기사가 나가자 기업 몇 군데서 이런 취지의 전화가 왔다. 이 지수는 아시아경제가 매년 국내 주요 기업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현장을 취재해 점수와 순위를 매기는 것으로 올해로 11년째다. 보도 초창기엔 기업이 순위 하락에 서운함을 표현하는 데 그쳤다면 최근엔 이를 개선 포인트로 삼는 사례가 많아졌다. 순위 하락 요인을 꼼꼼히 묻던 한 기업 인사담당 직원은 "양성평등 위크포인트(약점)를 내년도 업무전략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숫자가 공개되면 기업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다른 기업과 비교해 무엇이 부족한지 살피고 개선 방법을 찾는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땐 뒷전으로 밀렸을 문제가 경영진에게 설명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과제로 바뀐다. 아시아경제가 줄 세우기라는 비판 가능성에도 지수 항목을 세분해 1위부터 100위까지 양성평등과 저출생 관련 순위를 보도하는 것도 공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아시아경제 지수만의 얘기가 아니다. 정부가 저출생 대책의 하나로 2024년도 사업보고서부터 육아휴직·유연근무 사용 현황 공시를 의무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시가 시작된 뒤 기업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본지가 평가한 100대 기업과 37개 금융회사의 지난해 육아휴직 사용률은 전년 대비 각각 2.5%포인트, 6%포인트 올랐다. 유연근무 활용률은 각각 2%포인트, 2.5%포인트 개선됐다. 100대기업 중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이 한 자릿수인 곳은 2024년 60곳에서 지난해 33곳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법으로 보장돼 있어도 눈치를 보느라 쓰기 어려웠던 남성 육아휴직이 일부 선도기업을 넘어 대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의 출산율 반등도 이런 일터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지난 7월 출생아는 전년 동월 대비 11.1% 늘어 25개월 연속 증가했다. 올해 합계출산율이 7년 만에 0.9명대를 회복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출산율 증가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기업문화가 바뀐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첫 아이를 낳은 뒤 육아휴직을 쓴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3년 안에 둘째 이상을 낳은 비율이 더 높았다는 국가 통계가 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출산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공시는 바로 그 기대를 숫자로 확인시켜 준다. 아시아경제가 지수를 산출할 때 정부 인증이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국가 통계 등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도 기업의 개선 노력을 유도하고 그 결과를 숫자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정부가 추진하는 고용평등공시제는 이런 변화를 제도로 굳힐 기회다. 이 제도는 공공기관과 500인 이상 기업에 직종·직급별 남녀 근로자 수와 고용형태별 남녀 평균·중위임금 격차, 일·가정 양립제도 사용 현황 등을 공개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현재는 상장사만 사업보고서에 육아휴직·유연근무 사용률을 공시하는 만큼 공시 대상과 항목을 넓힌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장기적으로는 대상을 중견·중소기업까지 확대해야 한다. 격차가 큰 기업엔 개선계획 제출도 의무화해 공시가 실제 변화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AD

회사 순위가 왜 떨어졌냐는 전화가 더 많은 기업에서 걸려오길 바란다. 순위를 묻는 것이 변화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투명한 숫자가 기업을 움직이고 달라진 일터가 양성평등과 저출생 극복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최동현 기획팀장 nell@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