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 끊어진 사다리]①걸음마 떼자마자 악순환 말려든 생태계
국내 수소산업 총 투자액 3년 새 32% 감소
기존 시장 안착하기도 전에 청정수소 전환 압박
수요 부족→투자 지연→고비용 끝없는 악순환
①걸음마 떼자마자 악순환 말려든 생태계
②"정부 믿고 투자했는데"…끝나지 않는 '죽음의 계곡'
③딜레마에 갇힌 韓 청정수소 전환 정책
④청정수소 전환도 단계 있다…美·中·日 전략은
⑤"이상론에 갇힌 韓…현실적 경로 재설계해야"
"산업 생태계가 구축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불과 몇 년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나라 수소산업이 '무너지는 길'에 접어드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최근에 만난 수소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장기간의 투자와 기술 축적이 필요한 수소산업에서 기업이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려면 정책의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런 기반이 흔들리는 조짐이 곳곳에서 엿보인다고 그는 강조했다.
기업들의 투자 위축은 이런 위기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2일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수소산업의 총 투자액은 2021년 6조3604억원에서 2024년 4조3373억원으로 약 32% 감소했다. 2025년 수치는 아직 최종 집계되지 않았지만, 감소세가 뚜렷하게 반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특히 정부가 제시한 청사진을 믿고 이 분야에 뛰어든 중소기업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다. 한국은 비교적 이르게 수소경제 육성에 뛰어들며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부는 2019년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내놓고 수소차와 발전용 연료전지를 양대 축으로 산업 육성에 나섰다. 이듬해에는 세계 최초의 수소 관련 단일법인 '수소경제 육성 및 수소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수소법)'을 제정한 뒤 '2050 탄소중립' 목표를 공식화했다.
정부는 2021년 10월 인천에서 '수소경제 성과 및 수소 선도국가 비전' 행사를 열고 ▲국내 수소승용차 보급 대수 ▲발전용 연료전지 누적 보급량 ▲수소충전소 보급 속도 등 수소경제 관련 주요 3개 지표가 2년 연속으로 세계 1위를 달성했다고 홍보한 바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을 제친 성과였다는 것이다.
정부의 초기 정책과 투자가 수소차와 발전용 연료전지로 집중되자 수요처를 넓히고 산업 생태계 전반의 규모의 경제를 갖춰야 한다는 진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가 내놓은 방안이 '수소전문기업' 제도다. 매출과 연구개발(R&D) 투자 비중 등을 기준으로 사업화 및 판로 개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를 통해 수소전문기업을 2025년 100개, 2030년 500개, 2040년 1000개까지 늘리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런데 제도 도입 이후 매년 25개 안팎씩 늘던 신규 지정 기업은 지난해 9개에 그쳤다. 올해 9월 말을 기준으로 수소전문기업은 126개에 머무는 실정이다.
이런 난맥상의 배경에는 초기 시장이 충분한 자생력을 갖추기도 전에 정부가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이란 정책적·환경적 당위성 아래 탈(脫)탄소 전환에 무리하게 드라이브를 건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환을 서두르는 정책적 의욕이 역설적으로 업계의 부담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정부는 수소를 단순한 산업 성장의 동력원이 아니라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 수단으로 삼고, 재생에너지 확대와 탈탄소 전환에 정책의 무게를 싣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인천 행사 종료 20일 뒤, 정부는 2050년 탄소중립의 중간목표인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기존 2018년 온실가스 배출량 대비 26.3% 감축 수준에서 40% 감축으로 대폭 상향했다.
이런 속도전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관련 산업의 위축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됐지만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조금씩 이동시켰다. 이를테면 수송 부문에서는 승용차 중심이던 정책이 버스·트럭 등 상용차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수소공급 부문에서도 부생·개질수소 등 화석연료 기반의 그레이수소 중심에서 재생에너지 기반 그린수소 등 청정수소 비중을 확대하는 쪽으로 정책이 강화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존 수소시장의 수익성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 정책에 따라 기술 난도가 높고 투자 부담이 큰 청정수소 전환 과제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당장 청정수소를 생산하거나 도입한다고 해도 높은 생산단가가 문제였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지난해 말 연구를 통해 시장의 자생적 전환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으로 청정수소의 '비용 프리미엄'을 꼽았다. 청정수소 생산단가는 그레이수소보다 몇 배 높은 데다 공정 전환에 따른 추가 비용까지 발생해 기존 수소 소비자의 지불의사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 7월 기준 3.3㎿ 규모의 제주 행원 그린수소 생산시설의 생산단가는 이윤 등을 포함하면 약 4만원 수준이다. 반면 업계에 따르면 그레이수소는 3000원 안팎 수준이다.
이러한 가격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기존 수소를 청정수소로 대체하려는 수요가 충분히 생기기 어렵고 수소차 보급 등 초기 시장 형성까지 저해할 수 있다고 연구원은 지적했다. 현재 국내 수소 공급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부생수소(약 52%)와 개질수소(약 48%)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정수소 비중은 매우 미미하고, 생산도 아직 초기 단계다.
이런 가운데 수소발전 입찰시장을 둘러싼 잇단 정책 변화는 업계의 불안감에 기름을 부었다. 정부는 2040년 석탄발전 폐지 정책에 발맞춰 올해부터 청정수소발전시장(CHPS)에서 석탄·암모니아 혼소발전을 퇴출했다. 그동안 혼소발전은 기존 석탄화력발전 설비를 활용하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과도기적 전환 수단으로 활용돼왔다. 부생·개질수소가 참여할 수 있는 일반수소발전시장의 올해 개설물량도 지난해보다 28.5% 감소한 930GWh에 그쳤다. 더욱이 정부는 지난해 11월 2035 NDC를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는 수준으로 확정했다. 청정수소 전환의 필요성과 속도는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탄소중립을 위해 수소산업 전체를 키우던 정책이 탄소중립 기준에 부합하는 수소만 육성하는 방향으로 좁혀지자 업계는 이를 사실상 정부의 수소산업 육성 의지가 후퇴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존 수소시장을 키워 수요와 인프라, 기업의 투자 여력을 충분히 확보한 뒤 이를 발판 삼아 청정수소 시대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중간 과정이 사라졌다고 하소연한다. 청정수소 시대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가 중간에서 끊겼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킹크랩 1근 3천원, 먹고만 와도 남는다"…'가짜 출장' 달고 이 나라 몰려가는 중국인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기존 수소시장과 청정수소시장 양쪽의 정체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수요가 부족하면 기업은 설비와 인프라 투자를 미루고, 투자가 늦어지면 생산량과 인프라가 늘지 않아 가격을 낮추기도 어렵다. 높은 가격과 부족한 인프라는 다시 수요 확대를 가로막는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이런 현상은 정부가 한때 세계 1위를 공언했던 수소모빌리티 산업 현장에서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