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철, 이화정 외 6명 저 '나의 첫 번째 액션' 1·2
31명의 감독이 돌아본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아무도 성공을 약속하지 않던 때 그들은 무엇을 끝내 놓지 않았나

봉준호는 슬레이트를 잘 못 쳤다. 정확히는, 첫 슬레이트를 치다가 새끼손가락을 끼었다. 연습까지 꽤 했건만 돌아온 말은 냉정했다. "너는 무슨 슬레이트 치는 것도 NG를 내냐." 지금 봉준호의 이름 앞에는 칸 황금종려상이며 아카데미 작품상이며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이런 장면은 좀처럼 상상이 안 된다. 사람의 이력은 성공하고 나면 이상할 만큼 깨끗해진다. 앞부분의 NG는 잘라내고 그럴듯한 테이크만 이어 붙인다. '나의 첫 번째 액션'은 그 편집에서 잘려나간 필름을 모은 책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있다. '기생충'은 당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으로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있다. '기생충'은 당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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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나온 '데뷔의 순간'에 등장했던 감독은 17명이었다. 12년 뒤 개정증보판은 두 권, 31명, 576쪽이 됐다. 봉준호·박찬욱·허진호·이준익에서 윤가은·윤단비·정주리·임선애·김초희·한준희까지, 그 사이 한국영화의 얼굴이 바뀐 만큼 '감독이 되는 법'도 여러 갈래가 됐다. 제목을 바꾼 것도 흥미롭다. '데뷔'라고 하면 레드카펫 한쪽 끝에 출발선이라도 그어져 있는 듯하지만, '액션' 다음에는 언제나 '컷'이 있고 때로는 NG가 있다. 감독이 된다는 일이 어느 한순간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31명의 인생이 먼저 증명한다.


가장 나이 많은 신인은 강윤성이었다. 회사에 들어간 친구들이 과장·부장이 되는 동안 그는 아내 가게의 문을 여닫았다. 근처 카페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아내가 부르면 달려와 청소하고 가게를 봤다. 이른바 '셔터맨'. 그렇게 쓴 것이 '범죄도시'였다. 마흔을 훌쩍 넘겨 상업영화 감독이 된 사람에게 '청춘의 도전'이라는 표현은 조금 민망하다.

박찬욱의 버티기도 별로 모범적이지 않다. '달은…해가 꾸는 꿈', '3인조'가 잇달아 흥행에서 고전하던 시절, 이미 성공한 영화와 영화인을 흉보며 자신을 위로했다고 털어놓는다. 남들이 수십억원 들여 만든 영화를 욕하면서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인격수양에는 권하기 곤란하지만 영화감독 지망생의 생존술로는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훗날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왔다.

강윤성 감독. 아내 가게 일을 거들며 시나리오를 붙잡은 끝에 마흔을 훌쩍 넘겨 '범죄도시'로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했다. 그의 ‘첫 번째 액션’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래서 더 오래 걸린 출발이었다.

강윤성 감독. 아내 가게 일을 거들며 시나리오를 붙잡은 끝에 마흔을 훌쩍 넘겨 '범죄도시'로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했다. 그의 ‘첫 번째 액션’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래서 더 오래 걸린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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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책을 조금 의심해야 더 재미있어진다. 강윤성에게는 '범죄도시'가 왔고 박찬욱에게는 'JSA'가 왔으니, 앞선 세월은 이제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다.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같은 10년이 그저 실업과 실패였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31명은, 당연하지만 모두 감독이 된 사람들이다. 성공한 현재는 과거를 복선으로 바꾸는 아주 유능한 편집자다. 그러니 이 책을 "끝까지 버티면 결국 꿈을 이룬다"는 충무로판 자기계발서로 읽어서는 재미가 반감된다. 버틴 사람보다 사라진 사람이 훨씬 많았을 테고, 재능만큼 운과 돈과 사람과 시대가 필요했던 산업이 영화다. 책이 흥미로운 것은 성공의 비법을 알려줘서가 아니라, 성공 여부를 아무도 모르던 때 이들이 무엇에 이상할 만큼 집착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으면 감독들의 첫 영화에서는 나중의 필모그래피가 희미하게 보인다. 완성된 '작가 세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평생 버리지 못할 질문의 원형 같은 것이 있다.


윤가은 감독. '우리들', '우리집'에서 아이들의 세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본 그는 2025년 '세계의 주인'으로 다시 한번 관계와 이해의 경계를 탐색했다.

윤가은 감독. '우리들', '우리집'에서 아이들의 세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본 그는 2025년 '세계의 주인'으로 다시 한번 관계와 이해의 경계를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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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은 이창동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다가 "그런데 너는 이 이야기를 믿니?"라는 질문을 받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 처음 알았던 감독이다. '우리들'과 '우리집'을 거쳐 2025년 '세계의 주인'에 이르러서도 그는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우리의 확신을 다시 의심한다. 2026년 백상예술대상 감독상까지 받은 지금 돌아보면 재미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창동의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이경미도 비슷하다. '미쓰 홍당무'를 만들 때 그가 세운 목표는 단순했다. 남성의 시선 안에 갇힌 여자가 아니라 "직접 보고 말할 수 있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 공효진의 양미숙은 예쁘지도, 착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질투 많고 민망하고 때로는 끔찍했다. 당시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여성 주인공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던 성질이었다.


그 기이한 여성에 대한 애정은 '비밀은 없다'를 거쳐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의 이상한 히어로에게도 이어졌다. 감독은 첫 영화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평생 무엇을 자꾸 보게 될 사람인지 들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정주리는 여러 영화의 연출부에 지원했다가 모두 떨어졌다. 그래서 궁리한 방법이 제법 독하다. 남이 자신을 감독으로 뽑아주지 않는다면 장편 시나리오를 직접 쓴 뒤 "이건 나만 연출할 수 있다"고 우기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데뷔한 '도희야'에서 그는 폭력에 노출된 소녀를 바라봤고, 두 번째 장편 '다음 소희'에서는 콜센터 현장실습생의 죽음으로 시선을 옮겼다. 2014년과 2022년, 두 장편 모두 칸 비평가주간에 갔다. 겉모습은 달라도 질문은 닮았다. 왜 어떤 아이들에게 세상은 유난히 가혹한가. '다음 소희'를 만들며 정주리가 관객에게 바랐던 것도 한 아이의 죽음 뒤에 "어떤 시스템"이 있었는지를 봐달라는 것이었다. 첫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스타일보다 시선이었다.


그리고 감독에게 첫 영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쩌면 두 번째 영화다. 김성훈은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데뷔했지만 영화가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고, 다음 작품 '끝까지 간다'까지 7년을 보내야 했다.


변영주 감독. '낮은 목소리' 연작과 '밀애', '발레교습소'를 이미 만든 그에게도 '화차'는 또 한 번의 출발이었다. 감독에게 ‘첫 번째 액션’은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변영주 감독. '낮은 목소리' 연작과 '밀애', '발레교습소'를 이미 만든 그에게도 '화차'는 또 한 번의 출발이었다. 감독에게 ‘첫 번째 액션’은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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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는 '화차'를 자신의 새로운 출발로 기억한다. '낮은 목소리' 연작과 '밀애', '발레교습소'를 이미 만든 감독에게도 다시 출발해야 할 순간이 있었다. 장철수는 더 짓궂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로 칸에 갔고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대규모 관객을 만났는데도 이후 장편을 내놓기까지 긴 공백을 견뎌야 했다.


데뷔만 하면 영화감독이 되는 줄 알았는데, 영화는 매번 "그래서 다음 것은?"이라고 묻는다. 책에서 우민호 장 제목이 '데뷔의 순간은 한 번이 아니다'인 이유다.


'데뷔'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자의적인지도 이 책은 슬쩍 보여준다. 봉만대에게 극장용 장편 데뷔작은 2003년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이지만, 그는 그 전에 이미 에로비디오 현장에서 오랫동안 연출 경험을 쌓았다.


김초희는 프랑스로 날아가 아르바이트로 카메라와 조명을 샀고, 첫 촬영장에는 10㎝ 하이힐을 신고 나타날 정도로 현장을 몰랐던 시절을 지나 훗날 오랫동안 영화 제작 현장에서 일했다. 그러고도 자신의 첫 장편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내놓기까지 다시 시간이 필요했다. 남들은 이제야 '신인감독'이라 부르는데 정작 본인은 영화 근처에서 십수년을 산 경우다. 영화판에서는 신입사원의 나이를 묻는 일이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봉준호의 슬레이트 이야기가 뇌리에 깊이 남는다. 2025년 '미키 17'을 내놓았을 때도 그는 새 영화가 공개되기 전의 두려움이 여전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극장에 들어가면 뒤쪽에서 관객들이 휴대전화를 보는지도 살핀다고 했다.


한때는 슬레이트 하나 때문에 긴장하던 스태프였고 이제는 세계가 새 영화를 기다리는 감독인데, 영화가 관객 앞에 놓이는 순간의 불안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슬레이트에서 휴대전화로, 걱정의 대상만 조금 비싸졌다.

[이 책 어때]봉준호도 첫 슬레이트는 NG였다 원본보기 아이콘

그러니 '나의 첫 번째 액션'의 가장 덜 흥미로운 독법은 '포기하지 말라'일 것이다. 31명의 이야기가 정말 보여주는 것은 끈기의 승리가 아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 시간이 무엇이 될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강윤성의 가게 문, 박찬욱의 험담, 봉준호의 새끼손가락, 윤가은 앞에 떨어진 이창동의 질문은 그 순간에는 전혀 전설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궁색하고, 민망하고, 불안한 하루였다.


첫 장면은 원래 그렇다. 찍고 있을 때는 그것이 첫 장면인지 모른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간 뒤에야 사람들은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며 말한다. 아, 영화가 여기서 시작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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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번째 액션 1·2 | 주성철 외 7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96쪽·280쪽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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