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서 북미 첫 대규모 회고전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26년 신작까지 50점
'단색화 거장' 넘어 전후 한국 추상의 실험가로…배압법·물성·신체 노동 집중 조명

사진으로 볼 때는 고요한 단색의 화면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친 마대의 성긴 틈 사이로 물감이 뭉쳐 솟아 있고, 밀고 긁고 눌렀던 손의 압력이 표면에 고스란히 굳어 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서 열린 언론 사전 공개 행사에서 현지 기자들이 하종현의 '접합'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이유다. 이소영 관장은 40년 넘게 이곳에서 근무한 보안요원조차 작품을 보고 "이런 페인팅은 처음 본다"고 감탄했다고 전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서 열리는 ‘하종현: 회고전’ 설치 전경. 1960년대 실험작부터 ‘접합’ 연작과 최근작까지 하종현의 60여년 작업 세계를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국제갤러리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서 열리는 ‘하종현: 회고전’ 설치 전경. 1960년대 실험작부터 ‘접합’ 연작과 최근작까지 하종현의 60여년 작업 세계를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국제갤러리

AD
원본보기 아이콘

한국 전후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하종현의 60여년 작업을 되짚는 '하종현: 회고전(Ha Chong-Hyun: Retrospective)'이 오는 25일 이 미술관에서 개막한다. 하종현의 북미 첫 대규모 미술관 개인전이다. 1960년대 초기작부터 지난해와 올해 제작한 신작까지 회화 50점을 통해 '단색화 거장'이라는 익숙한 이름 뒤에 가려졌던 실험의 궤적을 펼쳐놓는다. 전시는 내년 1월25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색'보다 '재료'다. 193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하종현은 한국전쟁 이후 물자가 부족하고 사회가 급속히 재편되던 시기에 작업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물감과 종이, 실을 화면에 붙이고 불로 표면을 그을리는 등 기존 회화의 틀을 흔들었다. 1969년에는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창립 멤버로 참여해 신문지와 철조망 같은 일상의 물질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은 그의 작업에 전후 한국의 '격변과 결핍, 급속한 변화'가 재료 자체로 스며 있다고 설명한다.

1967년작 '나상스-B(Naissance-B)'를 보면 지금의 단색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붉고 푸른 색면과 반복되는 원형 구조가 화면을 강하게 분할한다. 같은 해 제작된 '도시계획백서 67'에서는 산업화와 도시 확장의 감각이 기하학적인 면과 선으로 번역됐다. 하종현은 처음부터 '흰색이나 갈색을 반복한 작가'가 아니었다. 앵포르멜과 기하추상, 실험미술을 통과한 뒤 지금의 회화 언어에 도달했다.


하종현 ‘접합 83-08(A+B)’(1983). 마대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앞면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배압법’을 활용한 대표적인 ‘접합’ 연작이다. 유채·마, 220×220㎝. 국제갤러리

하종현 ‘접합 83-08(A+B)’(1983). 마대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앞면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배압법’을 활용한 대표적인 ‘접합’ 연작이다. 유채·마, 220×220㎝. 국제갤러리

원본보기 아이콘

결정적인 전환은 1974년 시작된 '접합(Conjunction)'이었다. 그는 전후 곡물과 물자를 운반하는 데 쓰였던 거친 마대를 캔버스로 삼았다. 일반적인 화가처럼 화면 앞에서 물감을 칠하지 않았다. 마대 뒤쪽에 두꺼운 유화물감을 바른 뒤 밀어 앞쪽으로 배어나오게 했다. 성긴 직조 사이로 물감이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압력과 저항, 재료가 버틴 흔적이 표면에 남았다. 그가 '배압법(背押法·back-pressure method)'이라 이름 붙인 방식이다.

그래서 '접합'은 눈으로만 보는 회화라기보다 만드는 행위까지 상상하게 하는 그림이다. 1983년작 '접합 83-08(A+B)'에서는 마대 아래쪽을 그대로 노출한 채 회갈색 물감이 화면 위로 촘촘히 스며 올라간다. 물감을 덧칠해 마대라는 재료를 감추는 대신, 캔버스와 물감이 맞붙고 밀어내는 과정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220×220㎝ 크기의 두 화면이 맞닿은 중앙의 가느다란 틈 역시 '접합'이라는 제목을 물리적으로 증명한다.

하종현 ‘접합 25-19’(2025). 푸른 물감이 화면 위에서 아래로 흩어지듯 번지는 최근작으로, 아흔을 넘긴 작가가 이어가는 ‘접합’ 연작의 현재를 보여준다. 유채·마, 182×227㎝. 국제갤러리

하종현 ‘접합 25-19’(2025). 푸른 물감이 화면 위에서 아래로 흩어지듯 번지는 최근작으로, 아흔을 넘긴 작가가 이어가는 ‘접합’ 연작의 현재를 보여준다. 유채·마, 182×227㎝. 국제갤러리

원본보기 아이콘

1990년대 이후에는 색과 몸짓이 한층 강해졌다. 1998년작 '접합 98-203(A+B+C)'에서는 짙은 청색 물감이 세 폭의 마대 위에 묵직하게 밀려 나왔고, 최근 작업으로 갈수록 색채는 더욱 선명해진다. 지난해 제작한 '접합 25-19'는 푸른 물감이 화면 위쪽에 응축됐다 아래로 갈수록 흩어지는 듯하고, 올해 신작 '접합 26-14'에서는 화면 전체가 강렬한 붉은색과 주황색 물질의 흔적으로 뒤덮인다. 1970년대 단색화의 절제된 색조에서 출발해 다시 강렬한 색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2010년대부터 전개한 '이후접합(Post-Conjunction)'은 또 다른 변주다. 나무 조각을 감싼 캔버스를 막대기로 눌러 물감을 틈 사이로 흘려보내거나 천을 콜라주하고, 거울 같은 재료까지 끌어들였다. 올해 제작한 '이후접합 26-503'은 유화물감과 잉크 콜라주를 결합해 길게 떨어지는 색의 흔적을 만든다. 아흔을 넘긴 작가가 여전히 '접합'이라는 방법을 고정된 양식이 아니라 계속 바꾸어가는 실험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소영 AAM 관장(왼쪽)과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이 2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Asian Art Museum·AAM)에서 열린 하종현(91) 회고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소영 AAM 관장(왼쪽)과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이 2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Asian Art Museum·AAM)에서 열린 하종현(91) 회고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원본보기 아이콘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도 이 지점을 강조했다. 하종현을 단색화라는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에 묶기보다, 전후 한국사회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회화의 경계를 시험한 작가로 읽겠다는 것이다. 실제 전시는 그의 작업을 도널드 저드와 아그네스 마틴 등 서구 전후 추상미술의 흐름과 나란히 놓는다. 반복성과 물질에 대한 관심은 공유하지만, 산업적인 정밀성을 지향했던 서구 미니멀리즘과 달리 하종현의 화면에는 밀고 누른 노동, 재료의 저항, 불균일한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남는다.


이소영 관장은 이를 "추상을 순수한 시각 언어가 아니라 본능적이고 신체적인 경험으로 다시 보게 하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현지 사전 공개에서도 관심은 바로 화면의 물성에 집중됐다. 기자들이 작품 표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사진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게 현지 보도의 전언이다. 아직 일반 관람객에게 문을 열기 전인 만큼 이를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기존 서구 추상회화에서는 보기 힘든 제작 방식이 첫 반응을 끌어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하종현: 회고전’ 전경. 마대의 물성과 신체적 행위를 전면에 드러낸 ‘접합’ 연작을 비롯해 작가의 60여년 화업을 조명한다. 국제갤러리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하종현: 회고전’ 전경. 마대의 물성과 신체적 행위를 전면에 드러낸 ‘접합’ 연작을 비롯해 작가의 60여년 화업을 조명한다. 국제갤러리

원본보기 아이콘

이번 회고전은 최근 미국 미술계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는 흐름과도 맞물린다. 이 관장과 김 감독은 과거 한국 미술을 해외에 '소개해달라'고 요청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해외 미술관이 먼저 한국 작가와의 협업을 제안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K팝과 영화·드라마·음식 등 한국문화가 미국의 일상에 가까워지면서 미술 역시 '이국적인 한국 문화'가 아니라 개별 작가의 언어와 국제 현대미술사의 한 축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진단이다.


전시장이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곳은 고대 유물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아시아·아시아계 미국 미술 2만여점을 소장한 주요 기관이다. 1989년 미국 미술관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미술 전담 큐레이터 직책을 만들었고, 2003년 상설 한국실을 열었다. 올해는 서울과 샌프란시스코가 자매도시 관계를 맺은 지 50년이 되는 해다.

AD

하종현 자신은 이번 전시를 '회고'로만 부르지 않는다. 그는 아흔을 넘겨 미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갖게 된 데 대해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지금도 작업실에서 땀 흘리며 그려 나가는 현재진행형 흔적"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말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