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20년 잠든 제주 폐건물에 쏟아진 숫자들…이케다 료지의 감각 실험
제주 애월 하우스오브레퓨즈서 24일 개인전 개막…국내 역대 최대 규모
25m 데이터 터널·세계 최초 신작 공개…빛과 소리로 인간 지각의 한계 탐색
제주 애월의 숲속, 20년 넘게 방치됐던 콘크리트 건물에 숫자들이 쏟아진다. 천장의 발광다이오드(LED) 화면을 따라 질주하는 데이터가 양옆 거울에 반사되면서 25m 길이의 통로가 끝없이 확장된다. 그 안을 걷는 관객의 몸도 수없이 복제된다. 어느 것이 실재이고 어느 것이 거울 속 허상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숫자를 바라보던 사람은 자신 역시 데이터의 일부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든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60)가 제주에서 펼쳐 보이는 세계다. 제주시 애월읍 복합문화공간 하우스오브레퓨즈에서 24일 개막하는 개인전 '료지 이케다(Ryoji Ikeda)'는 국내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세계 최초 공개 신작 3점과 새로운 버전의 작품 2점, 국내 미공개작 등이 약 1000㎡의 전시장을 채운다. 작품 배치와 조명, 관람 동선까지 작가가 직접 설계했다.
전시의 시작을 여는 '더 크리티컬 패스(the critical paths)'는 이케다의 작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에스토니아 타르투대학교 유전체학연구소와 협업해 확보한 10만명의 유전체 데이터를 빛과 소리로 변환한 작품이다. 인류가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축적한 변화와 분기의 시간이 LED 화면을 따라 흐른다. 양쪽 거울에 반사된 데이터는 좁은 통로를 무한한 공간처럼 만든다. 인간의 역사를 담은 정보 속으로 관객이 직접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그런데 이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정작 관객이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얼마나 될까. 유전체 데이터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화면을 스치는 숫자와 기호만으로 인간의 진화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작가가 설계한 공간은 데이터를 설명하는 전시실이라기보다,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드러내는 실험실에 가깝다.
이 질문은 제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 '디 이리듀서블(the irreducible)'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칠흑 같은 전시장에 거대한 LED 화면이 들어서고, 수백만 자리의 숫자가 벽면을 가득 채운다. 바닥에 설치한 거울은 숫자를 다시 반사해 공간을 확장한다.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숫자들이지만, 사람의 눈으로 그 전체를 읽거나 숨겨진 규칙을 완전히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리듀서블(irreducible)'은 더 이상 줄이거나 환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작가는 정확하게 기록된 수조차 인간이 그 성질을 온전히 검증하기 어려운 상황을 작품으로 옮겼다. 여기서 숫자는 명확한 답을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닿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매체가 된다. 전시 측이 설명하는 '수학적 숭고' 역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신작 '디 이리듀서블 [nº13]'은 오히려 정적이다. 100만 자리가 넘는 하나의 수를 35㎜ 영화 필름에 인쇄해 라이트박스 안에 설치했다. 빛이 필름을 통과하면 깨알 같은 숫자들이 하나의 이미지처럼 나타난다. 영화 필름이지만 움직이는 영상은 없다. 한없이 이어지는 숫자를 제한된 길이의 필름에 새겨 넣으면서, 작가는 무한한 수의 세계를 유한한 물질 안에 붙잡아 놓는다.
반대로 '스핀(spin)'은 움직임 자체를 이용해 감각을 속인다. 머리 위 허공에서 레이저의 작은 점이 빠르게 움직이자 선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겹치면서 입체적인 형상이 떠오른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움직이는 빛의 점이지만 인간의 눈은 이를 하나의 연속된 형태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본다고 믿는 세계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한다.
18개의 LCD 화면이 정밀하게 맞물려 움직이는 '데이터닷그램 [nº9]'과 소립자부터 우주까지 과학 데이터를 재구성한 '데이터 버스 2(data-verse 2)'에서는 작곡가로서 이케다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각각의 화면에서 움직이는 데이터는 독립적인 장면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시청각적 구조를 이룬다. 화면의 변화와 전자음이 결합하면서 숫자와 코드는 일종의 악보처럼 작동한다.
이케다는 1990년대부터 전자음악과 데이터, 수학적 구조를 결합한 작업을 이어왔다. 일본의 실험예술 그룹 덤타입(Dumb Type)에서 활동했으며, 파리 퐁피두센터와 뉴욕 파크 애비뉴 아머리 등 세계 주요 미술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고, 올해 제9회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번 제주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작품만큼이나 공간이다. 하우스오브레퓨즈는 20여년간 방치됐던 애월 숲속 건물을 2024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한 곳이다. 기존 건물의 콘크리트 구조를 살리면서 전시와 음악, 영화, 음식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수용하도록 꾸몄다. 건물 뒤편에는 소나무숲과 잔디밭이 펼쳐진다.
외부의 자연과 내부의 인공적인 데이터 세계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바깥에서는 햇빛과 날씨에 따라 숲의 표정이 달라지고, 내부에서는 정교하게 계산된 빛과 소리가 관객의 감각을 흔든다. 일부 작품에는 자연광도 활용돼 관람 시간과 날씨에 따라 공간의 인상이 달라진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자연의 변수를 받아들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지난 22일 언론 사전 공개 행사에서는 작가가 직접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검은 옷과 모자, 색안경 차림으로 등장한 이케다는 10대의 턴테이블에서 서로 다른 주기로 반복되는 소리를 작동시켰다. 낮게 울리는 기계음과 짧은 신호음들이 조금씩 어긋나고 다시 겹쳐지면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작가의 스튜디오 매니저는 이처럼 10대의 턴테이블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약 20년 만에 봤다고 설명했다.
철저한 계산에서 출발하지만 결과에는 우연이 개입한다. 서로 다른 시간차를 두고 반복되는 소리들이 매번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이케다의 작업이 차가운 숫자와 기계적인 정밀함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거대한 LED 화면과 강렬한 전자음은 그 자체로 충분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관객은 쏟아지는 빛과 소리에 압도된다. 이번 전시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그 장관에 감탄한 다음에 시작된다. 눈앞에서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숫자를 만들었지만, 이케다는 그 숫자를 이용해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수백만 자리의 숫자도, 10만명의 유전체 데이터도 컴퓨터에는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언제나 일부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에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제주 숲속의 오래된 건물에서 이케다는 관객의 눈과 귀를 흔들며 그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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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내년 1월 18일 까지 이어진다. 관람료는 2만3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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