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단계 BK21은 정원을 채우는 사업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사업이어야 한다."
2031년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의 첫 팹이 가동을 시작한다. 반도체·피지컬 인공지능(AI)·AI 데이터센터를 3대 메가프로젝트로 내걸고 서남권에만 800조원 규모의 생산 거점을 조성하겠다는, 국가의 명운을 건 투자가 맺을 첫 결실이다. 그날 그 라인에서 장비를 길들이고 수율을 끌어올리며 다음 세대의 소자를 궁리하고 있을 연구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학부 4년 위에 석·박사 5~7년. 시간을 거꾸로 짚어 보면 그는 지금 대학원 진학을 저울질하는 학부생이거나 이제 막 실험실에 첫발을 디딘 신입생이다. 팹의 완공은 예산과 의지로 몇 년을 앞당길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연구자가 자라는 시간만큼은 어떤 자본으로도 압축되지 않는다.
숫자는 이미 경고하고 있다. 한 분석은 향후 10년간 국내 반도체 산업에서만 석·박사급 인력 5000여명이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스템반도체, 공정·장비, 소재 등 부족이 가장 첨예한 분야는 하나같이 대학원에서만 길러지는 고급 인력에 기대는 영역이다. 반도체는 ㎚를 다투는 산업이지만 그 산업을 떠받칠 사람을 기르는 일은 10년 단위로 승부가 난다.
반도체 경쟁의 승부처는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이다. 새로운 소자 구조, 차세대 소재, 피지컬AI 시대의 저전력 연산 등 판을 바꾸는 기술은 예외 없이 석·박사 과정의 실험실에서 태동했다. 대학원의 연구 역량이 곧 국가의 기술주권이라는 뜻이다. 마침 올해 말에는 5단계 BK21의 기본계획 수립이 예정돼 있다. 이 사업을 여러 대학원 재정지원 사업 가운데 하나로 다뤄서는 안 된다. 팹과 데이터센터와 피지컬 AI에 이은 메가프로젝트의 네 번째 축, 곧 '사람의 축'으로 설계해야 한다.
관건은 '어떻게'다. 지난 네 단계의 BK21이 우리 대학원의 연구 체력을 끌어올린 공은 분명하다. 그러나 반도체 대학원에 필요한 것은 지원금의 증액이 아니라 사업의 문법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다.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권역마다 질 높은 '대학팹'을 두고 함께 쓰자. 반도체 특성화대학원 사업 등으로 자체 팹을 갖춘 대학이 늘어난 것은 진전이지만, 산업 현장과의 세대 격차를 피하기는 어렵다. 대학마다 작은 팹을 하나씩 더하는 경쟁 대신, 대학 컨소시엄과 기업과 정부가 공동 운영하며 교육과 연구 자체를 사명으로 삼는 팹을 산업 거점 권역마다 두고 소속을 가리지 않고 함께 쓰자. 유럽 대학들과 얽혀 세계 반도체 인재의 사관학교 노릇을 해 온 벨기에 'imec'이 좋은 사례다.
둘째, 국가산단의 도면에 대학원을 함께 그려 넣자. 대만 신주과학단지의 인재 양성 비결 중 하나는 단지 곁에 대학과 연구기관이 나란히 있었다는 사실이다. 용인 국가산단은 올해 부지 조성 공사에 들어간다. 팹과 도로를 그리는 지금이, 그 곁에 대학원 연구동과 공유 클린룸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셋째, 돈이 과제가 아니라 사람을 따라다니게 하자. 프랑스는 기업이 박사과정생을 정식으로 고용하고 정부가 인건비를 분담하는 산업박사 제도, 이른바 'CIFRE'로 이 문제를 풀었다. 우리도 기업 고용형 산업박사를 반도체 분야에 도입하고, 국가가 학생 개인에게 직접 지급하는 '반도체 펠로십'을 대폭 늘려 수혜 학생이 지도교수와 실험실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 돈이 과제를 따라다니는 한 대학원생은 '인력'에 머물지만, 돈이 사람을 따라다니는 순간 그는 '연구자'가 된다.
넷째, 가르칠 사람의 울타리를 넓히자. 반도체 전공 교수가 수백 명뿐이라면 대학 밖의 스승을 강단으로 모셔 오면 된다. 기업의 수석·마스터급 엔지니어가 정식 공동 지도교수를 맡는 산학 겸직, 이른바 크로스어 포인트먼트를 5단계의 표준 모델로 삼고, 거꾸로 교수는 안식년을 팹에서 보내며 최신 공정을 몸에 익히게 하자.
이 모든 제도의 종착점은 하나다. 가장 우수한 학생이 대학원을, 연구자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안정된 처우와 예측 가능한 진로, 그리고 자신의 연구가 국가 대도약의 한복판에 있다는 자부심 등 5단계 BK21이 대학원생의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메가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날, 우리 눈앞에 서 있을 것은 팹과 데이터센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을 채우고 그다음 도약을 열어 갈 진짜 유산은 한 세대의 연구자다. 800조원이라는 숫자 곁에 '대학원'이라는 두 글자가 나란히 놓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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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원 경희대학교 반도체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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