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슬씨, 6.5㎝ 조선 백자 온몸으로 재현…275팀 643명 중 대상
지난해 '인간 금귀걸이' 이어 아이디어·유물 해석 돋보여…결선엔 3000명 몰려

화려한 국새도, 정교하게 재현한 반가사유상도 아니었다. 올해 국립중앙박물관 '분장놀이'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은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바닥에서 펄떡인 한 마리 '잉어'였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중박 분장놀이' 결선 시상식 모습. 왼쪽은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 오른쪽은 대상 수상자인 전은슬 씨. 연합뉴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중박 분장놀이' 결선 시상식 모습. 왼쪽은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 오른쪽은 대상 수상자인 전은슬 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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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 결선에서 대학생 전은슬(22)씨가 '백자 잉어모양 연적'을 재현해 대상을 받았다. 올해 처음 전국 단위로 판을 키운 행사에는 275팀 643명이 출전했고 춘천·공주·대구·전주에서 권역별 본선을 거친 25팀이 결선에 올랐다. 지난해 83팀이 참가했던 것과 비교하면 참가 규모가 3배 이상 커졌다.


전씨의 무대는 오히려 단순했다. 푸른 비늘과 둥근 눈을 그린 몸에 붙는 의상을 입고 바닥에 엎드린 뒤, 갓 잡힌 잉어처럼 온몸을 튀겼다. 결선에서는 낚시꾼이 내미는 먹이를 따라 몸을 움직이는 퍼포먼스까지 더했다. 화려한 장치 대신 유물의 둥글고 통통한 형태와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라는 특징을 몸 하나로 밀어붙였다. 현장에서는 가장 큰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가 고른 실제 유물의 공식 명칭은 '백자 청화 물고기모양 연적'이다. '백자 청화 잉어모양 연적'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제작된 높이 6.5㎝, 길이 11.5㎝의 작은 백자로, 벼루에 먹을 갈 때 쓸 물을 담아두는 문방구다. 잉어 몸통을 입체적으로 빚고 청화 안료로 비늘과 눈 등 세부를 표현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국가 기증품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전씨가 이 유물을 택한 것도 유명세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 유물을 봤을 때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느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을 알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만들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처럼 특징이 뚜렷한 점도 선택에 영향을 줬다. 결선 전날까지 전공 시험을 치른 그는 '갓 잡은 활어'의 통통 튀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낚시꾼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급히 준비했다.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서 대상을 받은 전은슬씨가 ‘백자 잉어모양 연적’을 재현해 바닥에 누운 채 몸을 펄떡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tv 영상 캡쳐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서 대상을 받은 전은슬씨가 ‘백자 잉어모양 연적’을 재현해 바닥에 누운 채 몸을 펄떡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tv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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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씨에게 잉어는 조금 다른 의미도 겹쳤다. 그는 이번 참가를 "나 자신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도전"으로 여겼다. 급류를 거슬러 오른 잉어가 용이 된다는 '등용문'의 이야기가 진로를 고민하는 자신의 상황과도 맞닿았다. 대상 수상 뒤에는 "많은 용기를 얻었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 결과가 눈길을 끈 것은 결선 무대에 공들인 분장과 전문적인 퍼포먼스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1년 일제에 반출됐다 돌아온 대한제국 국새 '제고지보'를 금빛 의상으로 재현한 팀부터 국보 반가사유상, 무령왕릉의 진묘수, 청동 공양탑, 단종 복위 시호 금보까지 다양한 유물이 20m 안팎의 런웨이에 등장했다.


웹툰 작가 닥터베르는 반가사유상이 직접 회전하는 모습을 선보였고, 코스프레 활동가 박도현도 같은 유물을 전문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로 풀어냈다. 농구선수 출신 모델 이혜정은 청동기시대 간돌검이 돼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옆으로 걸었다.


최우수상에는 반가사유상과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청동 방울, 국새 제고지보, 단종 복위 시호 금보를 표현한 5팀이 이름을 올렸다. 천흥사명 동종과 왕흥사터 사리구, 진묘수, 성덕대왕신종, 청동 공양탑을 표현한 팀들은 우수상을 받았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중박 분장 놀이'결선 진출자 런웨이 행사에 참가자들이 '청동공양탑'을 주제로 한 분장쇼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중박 분장 놀이'결선 진출자 런웨이 행사에 참가자들이 '청동공양탑'을 주제로 한 분장쇼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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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비교적 소박한 전씨의 '잉어 연적'이 최고상을 받은 배경에는 이 행사가 단순한 분장 완성도 경쟁이 아니라는 점이 있다. 박물관이 공개한 심사 기준에는 참가 동기와 지역 연계성, 유물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뿐 아니라 창의성과 재해석, 대중적 확산 가능성 등이 포함돼 있다. 결선에서도 심사위원 5명이 무대 표현과 창의성 등을 종합해 수상자를 가렸다. 고가의 의상이나 외부 전문 인력을 얼마나 투입했느냐보다 유물을 어떻게 읽고 자신의 방식으로 바꿔냈느냐가 중요한 셈이다.


이 때문에 행사 뒤 온라인에서는 전씨의 수상을 두고 "분장놀이의 취지에 가장 잘 맞는다", "기교보다 아이디어와 개성을 본 것 같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전문 분장과 대형 소품 중심의 '고퀄리티 경쟁'으로 흐를 경우 참가 문턱이 높아질 수 있는 만큼, 누구나 아이디어로 유물을 표현할 수 있다는 행사 성격을 살렸다는 평가다.


이런 '과몰입'은 지난해부터 행사의 흥행 동력이 됐다. 2025년 대회의 대상 격인 '반가사유상'을 받은 강한민·권형순씨의 '귀에 걸면 귀걸이' 팀은 보물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한 쌍을 온몸으로 재현했다. 금빛 전신 의상에 귀걸이의 세부 장식까지 살린 모습이 온라인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두 사람은 유명 국보 대신 "많이 봤지만 이름은 잘 모르는 유물"을 찾다가 역사 문제집에서 금귀걸이를 발견했다고 했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중박 분장 놀이'결선 진출자 런웨이 행사에 참가자들이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엄품'를 주제로 한 분장쇼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중박 분장 놀이'결선 진출자 런웨이 행사에 참가자들이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엄품'를 주제로 한 분장쇼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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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씨는 상반신 도색과 전신 타이즈까지 동원해 유물의 곡선과 장식을 표현했다. 수상 뒤 두 사람은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해 의상 제작 과정과 참가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지난해의 '인간 금귀걸이'가 유물을 몸으로 복제하는 과몰입의 재미를 보여줬다면, 올해 '잉어 연적'은 여기에 참가자의 해석과 개인적 이야기를 한층 강하게 얹은 사례가 된 셈이다.


행사 자체도 빠르게 커졌다. 2024년 '국중박이 살아있다'의 한 프로그램으로 출발해 지난해 '국중박 분장놀이'라는 이름을 내걸었고, 올해는 전국 14개 국립박물관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확대됐다. 춘천·공주·대구·전주에서 지역 본선을 열어 지역 유물을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참가자는 역대 최대였다.


관람 열기도 뜨거웠다. 박물관이 결선 관람객 200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하자 신청이 일찌감치 마감됐고, 당일 현장에서 행사를 지켜본 관람객까지 합하면 박물관 추산 약 3000명이 열린마당을 채웠다. 계단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에스컬레이터와 유리 난간 주변까지 사람이 몰려 안전 안내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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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전시장 안에 갇힌 유물이 현재에 살아나온 것"이라며 참가자가 유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펼치는 점을 이 행사의 특징으로 꼽았다. 문화유산을 조용히 '보는' 박물관에서 직접 골라 입고, 움직이고, 웃으며 해석하는 박물관으로 관람 방식이 확장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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