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에너지 병목에 빠진 대한민국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 줄이고
미국·아프리카 원유량 늘어
중질유 특화·최단 거리 이점에도
지정학적 리스크 이어지자
"에너지 안보 위해 다변화 필수"

편집자주최근 중동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위기, 정부의 메가프로젝트 등으로 에너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차 에너지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 경제 성장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정부와 산업계에서 에너지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하는 기자들이 다양한 현안들을 짚어보고 대안을 찾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중동산 원유 위주였던 국내 석유 에너지 공급망이 재편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대형 정유사들이 중동 의존도를 축소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 한 것이다. 그 결과 중동 지역에서 수입되는 원유 비중은 소폭 줄었고, 미국과 아프리카 대륙의 원유 수입이 늘었다.


19일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중동 수입 원유 물량은 62.3%로 지난해 상반기 68.6%에서 6.4%포인트 하락했다.

중동 지역 원유는 여전히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물량이 5761만 배럴 줄어들면서 의존도가 일정 부분 완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너지 오디세이]④흔들리는 중동 공급망…미국산 수입 확대 해답될까
AD
원본보기 아이콘


대신 이 기간에 미국산 원유로 대표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입 물량이 499만3000배럴로 늘어났고, 점유율도 23.4%에서 26.5%로 상승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수입 물량도 1만배럴대에서 약 2만6000배럴로 급증하며 점유율 역시 2%에서 5.6%로 뛰었다. 국가별로는 콩고가 536.6%, 가봉이 204.5%로 크게 늘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위기에 놓였던 지난 3월 당시 정부는 정유사들에게 미국산 원유 등을 수입하자고 했지만, 정유사들은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쟁이 단기간이 끝날 가능성도 있었고, 미국이나 유럽·아프리카산 원유를 들여온다고 하더라도 국내 정유사들이 가진 시설에는 성상이 맞지 않았던 탓에 설비가 멈출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정유사들은 수입국을 다변화할 수밖에 없게 됐고, 동시에 성상이 다른 원유를 섞어 기존 장비에 투입하는 실험을 진행하는 등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더럽고 끈적한 중질유가 더 좋은 이유


지난해까지만 해도 중동 원유 비중은 70% 안팎으로 여전히 국내 에너지 공급망의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동 지역은 원유 매장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원유의 물리적 특성과 지리적 물류 체계, 정유산업의 장기계약 구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동산 원유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원유의 성상과 수율 때문이다. 원유는 산지마다 성분이 서로 다른데, 이에 따라 정제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석유제품의 비율과 가치가 결정된다.


원유의 등급을 결정하는 기준은 'API 비중'과 황 함유량이다. API 비중은 미국석유협회(API)가 제정한 비중 측정 단위로 수치가 높을수록 가볍고, 수치가 낮을수록 무겁다. API 비중이 34도 이상이면 경질유(輕質油), 30도 이하면 중질유(重質油)로 분류한다. 그 사이 API도를 가진 원유는 가운데 중을 써 중질유(中質油)로 분류한다.


3대 원유 중 하나인 두바이유는 API도가 32.0도 황 함량이 1.68% 수준으로 고유황 중(中)질유로 분류된다. 반면, 영국 북해에서 생산되는 브렌트유나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API도가 34도 이상인 경질유이다. '정제할 것이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맑고 가벼운 경질유는 정제 과정이 단순하다. 정제를 많이 하지 않아도 값비싼 석유 제품을 많이 얻을 수 있어 원유 자체 가격이 높은 편이다.

[에너지 오디세이]④흔들리는 중동 공급망…미국산 수입 확대 해답될까 원본보기 아이콘

하지만 국내 정유사들은 오히려 불순물이 많은 원유를 재가공해 휘발유, 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바꿔 높은 마진을 남겨 왔다. 중질유 두바이유는 황이나 중금속 등 불순물이 많아 경질유와 비교해 가격이 저렴한 데, 우리나라 정유산업은 고도화 시설로 중질유 분해시설을 갖추고 중질유에서 분해된 찌꺼기 기름을 다시 분해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왔다. 중질유는 대체로 아스팔트나 대형 선박의 엔진 추진용이나 대형 보일러, 공장 산업용 연료로 사용되는 벙커C유 같은 저부가가치 제품이 많이 나오지만, 고도화된 설비 덕분에 고급 석유 제품을 뽑아내면서 정제 마진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일이면 운송 완료 지리적 최단 거리


원유 수급에서 성상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는 물류비용과 수송의 한계다. 원유는 중량이 막대하기 때문에 해상 운송 거리가 비용으로 직결된다. 수송 기간이 길어질수록 선박 체류에 따른 막대한 해상 운임은 물론 선원 인건비, 선박 연료비 또한 보험료 등이 복합적으로 불어난다.


페르시아만에서 출발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항로는 인도양, 말라카해협, 남중국해를 거쳐 평균 20일 안팎이면 국내 항구(울산·여수 등)에 도달한다. 편도 약 1만2000㎞로 중동 전쟁 이전까지는 가장 안정적이고 빠른 최단 거리다. 국내 정유사들이 중동 원유를 많이 수입하게 된 이유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다양한 우회로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대안으로 떠오른 곳은 홍해를 통한 우회로였다. 홍해와 아델만을 연결하는 바브엘만데브해협을 지나면 국내로 원유 운송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도 친이란 세력인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와 군사적으로 충돌하면서 최근 통행이 어려워졌다. 때문에 수에즈 운하를 지나 희망봉을 거쳐 오는 우회 항로를 통과하는 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망봉으로 우회할 경우 추가 거리는 9000㎞로 추가 소요 기간은 10일가량 더 늘어나며 비용도 더 추가된다. 원유량은 더 줄어든다. 수에즈 운하는 인공 운하로 초대형유조선(VLCC) 운항에는 한계가 있다. VLCC보다 한 단계 낮은 '수에즈맥스(Suezmax)'급 선박만 운항이 가능하다. 수에즈맥스는 적재된 상태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박 측정값을 나타내는 해군 건축 용어에서 유래했다.


미국산 원유는 파나마 운하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는 경로로 수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태평양 항로는 수로의 폭이 좁고 잦은 가뭄으로 수심이 얕아 지리적·물리적 제약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중동산 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지리적인 요인도 컸다. 그러나 최근엔 중동 노선도 급등했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중동과 중국 간 노선 27만t급 VLCC 스팟 운임 지수는 지난해 74에서 올해 326으로 급등하며 4.4배가량 상승했다. 최근 이 항로의 VLCC 하루 운임은 최대 80만 달러(약 10억 8000만원)까지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중동 전쟁 장기화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할 이유가 늘었다.


장기계약 대 현물계약 6 대 4 비율


국내 정유사들은 안정적인 원유를 공급받기 위해 1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진행해왔다. 산유국 정부, 국영석유회사 혹은 석유 주요 기업들과 계약을 맺고 일정 부분 이상을 장기계약 형태로 공급받는 방식이다. 전체 수입 원유의 약 60%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란 등 중동 국가들이 장기계약 거래를 선호해왔다. 석유 파동과 같은 일시적인 사태만 잘 넘기면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수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중동 원유의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약 40%는 현물계약으로 보통 장기계약을 통해 수급하는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 필요량을 현물계약 형태로 구입한다. 특정 시점에 특정 물량의 원유를 구입하는 현물계약 방식이다.

[에너지 오디세이]④흔들리는 중동 공급망…미국산 수입 확대 해답될까 원본보기 아이콘

원유는 다른 상품들과 달리 생산 및 저장·판매가 연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므로 스팟성 원유 구매와 도입은 대체로 월 단위로 진행된다. 정유사들은 현재를 기준으로 3개월 이후 공장 가동, 수급 계획 등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장기계약으로 도입된 원유와 함께 현물원유 구매 방안을 수립한다.


최근 중동 사태 이후 현물가격의 변동성이 높아져 정유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원유 구매 담당자들은 원유의 가용량, 가격변화, 판매자 등 모든 정보를 최대한 빠르게 파악하고 원유 하역과 수송 등에도 문제가 없는지 등을 점검해야 한다. 만약 하룻밤 사이에 발생한 사우디아라비아 송유관 펌핑장이 드론 공격처럼 피격되면서 시설이 망가지고 가동이 중단되면 원유 가격과 공급 등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해외 자원 개발 다변화 필요성 대두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원유 수입국을 다변화해 에너지 안보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달부터 중동 정세 불안에 대응해 비중동 지역 원유를 수입할 때 발생하는 운임 차액 전액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중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송 거리가 멀고 해상 운임 및 보험료 부담이 큰 미국이나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비중동산 원유 도입 시 발생하는 추가 물류비를 정부가 보전함으로써 정유사들이 직면한 경제적 진입 장벽을 낮추고 실질적인 수입선 다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적극적으로 해외 자원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한국석유공사는 2009년 캐나다 하베스트 인수와 지난해 베트남 15-1 광구 신규 지분 확보 등 자원 확보 노력을 지속해 왔다. 다만, 자원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 책임 문제는 난제로 남아 있다.

AD

장태훈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정책연구실 부연구위원은 "국내 자원 개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전략적 자원 개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직접 지분을 소유해도 좋고 일부만이라도 투자를 진행해 위기 상황에서는 수급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요인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동 전쟁과 같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 자원 안보 측면에서 특히 석유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더욱더 평시에도 공급망을 관리할 수 있는 종합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