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서 나란히 열린 두 전시
김보희 'TOWARDS: There Was Light'와 김 크리스틴 선 '달 마음'
자연과 마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기억'에서 만나는 순간

김보희의 'The Days' 앞에 서면 먼저 크기에 눌린다. 폭 6.48m의 화면을 여인초와 야자수, 고목과 풀들이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검은 반려견 레오는 그 숲 한가운데 태평하게 누워 있다. 사람 키만 한 잎과 나무가 관람객을 화면 안으로 밀어 넣는다. 제주 어느 곳에 이런 정원이 있을 것 같지만, 작가는 곧 부정한다.

김보희의 'Towards'. 제주 중문에서 해변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그린 작품. 실제 풍경을 출발점으로 삼되, 작가가 오래 보고 기억한 제주가 화면 안에서 다시 구성된다. 갤러리현대

김보희의 'Towards'. 제주 중문에서 해변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그린 작품. 실제 풍경을 출발점으로 삼되, 작가가 오래 보고 기억한 제주가 화면 안에서 다시 구성된다. 갤러리현대

AD
원본보기 아이콘

"이런 정원은 없죠. 제가 상상한 정원이죠." 실제 풍경을 그린 듯 보이는 김보희의 그림은 의외로 현실에서 멀다. 그는 "제가 보고 싶은 거대로 사실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 집 정원에서 본 야자수, 여미지식물원의 거대한 여인초, 오래 기억해온 산과 물을 한 화면에서 다시 조립한다. "구상이면서 사실은 추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렇다면 그의 그림에서 진짜 모델은 제주가 아니라 제주를 오래 바라본 사람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김보희는 2003년 제주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여행자처럼 섬을 돌아다녔지만 집과 작업실이 생긴 뒤 시선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당의 야자나무, 동백, 먼나무 열매, 무화과, 반려견 레오. 어느 날은 노을이 마당에 내려앉아 나무와 흙의 색을 통째로 바꾸는 장면을 보았다. "너무 좋아서 여러분들도 같이 이렇게 느껴줬으면 해서" 그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제주는 낙원으로만 남지 않는다. 집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 바다가 가려졌을 때 그는 1년 가까이 마당에 나가기 싫을 만큼 속상했다고 했다. 결국 동백나무로 담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중 한 그루가 죽었다. 그 틈으로 바다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감사하게 여기죠." 짧은 이 말이 김보희의 풍경을 꽤 정확하게 설명한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다. 혹은 마음이 달라지면서 풍경도 달라진다.

김보희의 'Towards'. 제주 집 정원에 저녁 노을이 내려앉으며 나무와 흙의 색까지 달라지는 순간을 옮겼다. 작가는 “너무 좋아서 여러분들도 같이 느껴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갤러리현대

김보희의 'Towards'. 제주 집 정원에 저녁 노을이 내려앉으며 나무와 흙의 색까지 달라지는 순간을 옮겼다. 작가는 “너무 좋아서 여러분들도 같이 느껴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갤러리현대

원본보기 아이콘

그 변화는 색에도 남는다. 제주 바다를 그리면서 그는 "낮은 물에는 옥색이 나오고, 깊으면 짙은 색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장소를 묻자 다시 선을 그었다. "색은 거기서 빌려왔지만 똑같은 데는 없어요." 실제 자연을 충실하게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시간에 의해 변한 기억을 다시 그리는 것이다.

갤러리현대의 다른 공간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김 크리스틴 선의 화면에는 숲도 바다도 없다. 검은 원과 곡선, 짧은 영어 단어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작가는 그림 앞에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미국 수어에서 '마음(Mind)'을 뜻하는 동작이다. "제 머릿속에서는 마음이 마치 덩어리처럼 혹은 바위처럼 느껴집니다."


김보희가 보이는 자연을 기억으로 바꾼다면, 김 크리스틴 선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물질로 바꾼다. 마음은 둥글어지고, 무거워지고, 다른 마음과 부딪친다. 생각이 마음에 닿으면 'Touch'이고 그것이 반복되면 집착이 된다. 시간이 흐르며 접촉이 약해지면 생각도 점차 희미해진다.

김 크리스틴 선의 'Rock Mind'.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으로, 선과 기호로 다뤄오던 ‘마음’을 평면 밖의 형태와 물성으로 확장했다. 갤러리현대

김 크리스틴 선의 'Rock Mind'.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으로, 선과 기호로 다뤄오던 ‘마음’을 평면 밖의 형태와 물성으로 확장했다. 갤러리현대

원본보기 아이콘

이 엄격한 문법 사이로 이번 전시에서는 뜻밖에 사적인 이야기가 스며든다. 'Worrississimind'는 음악 용어 'pianissimo'를 뒤튼 제목이다. 작가는 작은 'p'들이 반복된 그림을 가리키며 "마음 뒤편에서 조용히 걱정을 되뇐다"고 말했다. 바로 옆 'Piano Therapy'는 더 노골적이다. 심리상담을 받고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상태를 'p' 세 개로 표현했다.


"한숨을 내쉬는 듯한 감각입니다." 사회와 언어의 구조를 다뤄온 작가의 그림에서 '내가 걱정하고 있다'거나 '상담을 받고 조금 나아졌다'는 문장이 나온다. 거대한 담론 뒤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변화의 중심에 'Moon Mind'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셰이프드 캔버스다. 검푸른 두 화면은 위아래로 떨어져 있고, 사이에는 흰 벽이 남는다. 간격은 정해져 있지 않다. 좁힐 수도 있고 넓힐 수도 있다. 그 빈 공간까지 그림이다.


'Moon'은 달이면서 둘째 딸 '달(Dal)'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가 항상 제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언어와 기호로 마음을 설명해온 작가가 이제 마음의 거리와 부피까지 만들기 시작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작가가 정반대 방향으로 출발해 서로의 자리 가까이 간다는 점이다.

김 크리스틴 선의 'Mind Strong'. 걱정과 두려움, 분노와 기쁨 같은 감정에 둘러싸여도 마음의 본질은 온전한 구의 형태로 남는다는 생각을 담았다. 갤러리현대

김 크리스틴 선의 'Mind Strong'. 걱정과 두려움, 분노와 기쁨 같은 감정에 둘러싸여도 마음의 본질은 온전한 구의 형태로 남는다는 생각을 담았다. 갤러리현대

원본보기 아이콘

김보희의 그림은 구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억과 상상의 편집이다. 김 크리스틴 선의 그림은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가족과 걱정, 상담과 집착이 적힌 일기장에 가깝다. 한 사람의 자연은 점점 마음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은 점점 물질이 된다.


둘에게 이번 전시가 과거 작업의 요약에 머물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김보희는 38년 만에 갤러리현대로 돌아왔지만 회고하듯 말하지 않았다. 대작을 계속 만드는 이유를 묻자 "아직은 내가 젊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을 때 큰 작업 많이 하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더 늦기 전에 좀 해보려고 생각을 합니다." 김 크리스틴 선 역시 이미 익숙한 드로잉 문법에 안주하지 않고 캔버스와 색, 빈 공간으로 작업의 몸집을 넓힌다. 그래서 두 전시의 마지막에서 기억나는 것은 거대한 숲도, 검은 원도 아니다.


김보희의 어느 정원 그림 한쪽에는 빨간 커피잔 하나가 놓여 있다. 작가는 그 작은 물건을 왜 넣었느냐는 질문에 "나도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라고 답했다. 김 크리스틴 선은 반대로 두 캔버스 사이를 비워놓는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둘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AD

한 사람은 풍경 속에 자기 흔적을 남겼고, 다른 한 사람은 마음 속에 빈자리를 남겼다. 갤러리현대에서 나란히 열린 두 전시가 결국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그렸느냐보다, 한 사람이 세계를 오래 바라본 뒤 무엇을 남기게 되는가에 가깝다. 두 전시 모두 10월 18일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