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IP는 선택의 문제"…KT스튜디오지니가 그리는 '다음'
정근욱 대표 "방송 드라마 모델 무너져"
숏폼·영화 신사업본부로 위기 정면 돌파
"3~5년 뒤 매출 70%, 글로벌에서 창출"
"방송국 기반의 드라마 비즈니스모델은 무너졌다." 정근욱 KT스튜디오지니 대표가 내린 진단이다. 방송 광고 시장의 붕괴 탓이 크다. 지상파·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매년 뒷걸음질 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도 제작비 회수를 걱정할 정도다. 기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위기감이 정 대표를 움직이게 했다. 올해 신사업본부를 개설했다. 숏폼, 채널, 디지털, 웹소설, 영화사업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었다.
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에서 아시아경제와 만난 그는 "스타트업 방식의 실험"이라고 규정했다. 작게 실행해서 빠르게 고쳐나가는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외부에서 보면 기존에 있던 사업들이지만, 내부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라며 "드라마처럼 고착된 형태와는 다른, 의사결정 프로세스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사업 확장이 드라마 사업의 후퇴를 뜻하진 않는다. 정 대표는 "지난해부터 ENA 채널의 위치가 올라왔고, 저희가 만드는 작품의 질적 수준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기본기가 다져지면 더 좋은 창작자, 배우와 일할 기회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KT스튜디오지니는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올해 넌 캡티브(Non-Captive·외판용) 전략을 시작했다. 내년에 방영될 MBC 드라마를 제작한다. 우수한 창작자들과 함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오리지널이나 글로벌로 갈 수 있는 작품도 추진한다.
드라마가 이렇게 외연을 넓히는 동안, 신사업본부에선 또 다른 승부수가 준비되고 있다. 정 대표가 쇼박스, 메리크리스마스를 거치며 투신했던 영화다. 이 사업이 신사업본부에 묶인 데는 업계의 오랜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그는 손실을 투자사가 전액 떠안는 기존 구조를 예로 들며 "산업이 걸음마 단계였을 때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계속 유지될지는 늘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수익 배분 구조 실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20%와 80%, 30%와 70% 등 다양한 비율을 시도한다. 그중에는 인세를 많이 주는 대신 제작비를 낮추는 방식도 있다. 손익분기점(BEP)을 낮춘 만큼 수익을 낼 가능성이 커지면, 이를 창작자와 더 과감하게 나눈다는 구상이다. 변화는 제작 인력을 운용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신병 더 무비'가 대표적인 예다. 정 대표는 "민진기 감독과 촬영·조명·미술 스태프가 동명 드라마에서 그대로 넘어왔다"며 "뚜렷한 목적이 있다면 이런 시도를 계속 넓혀갈 것"이라고 말했다.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원소스멀티유즈(OSMU)지만, 그는 처음부터 의도한 결과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학계에서나 하기 좋은 말이지, 업계에서는 이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작 정 대표가 강조한 건 개별 사업의 자생력이었다. "지식재산권(IP)의 가치를 키우는 건 스튜디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여기에 너무 신경을 쓰면 개별 사업이 단단하게 크지 못한다"고 밝혔다. "사업 단위 하나하나가 독립적이면서 자생적인 구조부터 만들어야 한다"며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우리가 가진 IP 개발력과 유통력이 결합해 시너지는 자연스럽게 커진다"고 강조했다.
IP 소유에 관한 생각도 다르지 않다. 국내 제작사가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과 거래하며 IP를 넘기고 낮은 마진만 가져가는 구조는 자주 문제시돼왔다. 정 대표는 "IP를 가져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정답 같은 얘기"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실행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단기적으로 편안한 길과 어렵더라도 장기적으로 IP를 쥐고 가는 길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제작사가 넷플릭스 등과 계약할 때 IP를 못 가진다는 걸 사전에 몰랐을 리 없다"며 "당장의 수익이 기업 운영에 필요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신사업 확장은 결과적으로 이 선택지를 넓혀줬다. 정 대표는 "숏폼에서 조금씩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영화도 내년에 네 편 정도 개봉한다"며 "그렇게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면 IP를 좀 더 쥐고 움직여볼 여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스토리위즈 흡수합병에는 조금 다른 계산이 있었다. 정 대표는 숏폼 기획·개발을 전문화하면서 웹소설과 숏폼이 사실상 같은 서사 문법을 쓴다는 점에 주목했다. 중국의 대형 숏폼 플랫폼 드라마박스가 웹소설 회사에서 출발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봤다. 그는 "클리프행어(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도, 짧은 호흡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도 유사하다"며 "스토리위즈의 합류로 웹소설의 숨겨진 가치가 더해지면 퍼즐이 맞춰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숏폼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명확하다. 해외 시장이다. 정 대표는 "싸이에 이어 방탄소년단(BTS)이 자리를 잡으면서 K팝 시장이 열 배, 스무 배로 커졌다"고 말했다. 영화·드라마는 여전히 로컬 콘텐츠를 만들어 파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게 그의 아쉬움이다. 숏폼은 상대적으로 허들이 낮다. 1분 30초 안팎의 짧은 분량인데다 별도의 문화적 맥락을 설명하지 않아도 자막과 더빙만으로 해외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정교한 이야기 호흡보다 소재와 형식이 중요하다. 정 대표가 제작 방식이나 사업 모델, 특히 글로벌 유통 쪽에 더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다.
정근욱 KT스튜디오지니 대표가 1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의 '무한 확장성, 숏폼이 바꾼 미디어 패러다임과 비즈니스 모델'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한국콘텐츠진흥원.
원본보기 아이콘그렇다고 콘텐츠 자체와 거리를 두는 것은 아니다. 숏폼과 롱폼 사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빠른 전개, 말도 안 되는 개연성, 불친절한 서사 방식을 젊은 세대가 왜 계속 소비하는지 숏폼을 제작하면서 체감했다"고 말했다. 이런 감각은 롱폼 제작에도 반영되고 있다. "호흡이 길어지거나, 개연성 때문에 전사(前史)를 자꾸 끌고 들어오는 방식은 이제 안 먹힌다"며 "중간이 뻥 뚫려 있어도 사람들은 그걸 해석하면서 즐거워한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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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을 하며 얻은 건 서사 감각만이 아니다. 회사 전체를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3~5년 뒤 모습을 묻자 정 대표는 "근래 급성장한 K팝 기업처럼 늘어나는 매출에서 적어도 70%는 글로벌 시장에서 창출하고 싶다"고 밝혔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공급까지 포함하면 지금도 70~80% 수준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그런 걸 제외해도 최소 50~60%는 자체적으로 글로벌 매출이 나오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자리에 머무르면 위험하다던 위기감은 어느덧 세계로 나가는 비즈니스를 향한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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