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 밥이 된 1천만 원의 꿈, 모친과의 갈등
울산 중공업 노동자서 고향의 이장으로
"효도가 말처럼 쉽지 않심더"
장손의 무게, 그리고 울컥 쏟아낸 진심
경북 청도군 운문면.
조상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이 작은 마을은 토박이들과 귀농·전입한 주민 117명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평균 나이 60대 후반의 고즈넉한 시골 풍경 속에서, 2024년부터 이장을 맡아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김병준(67) 씨는 오늘도 어머니의 엉뚱한 '수확 릴레이' 뒤처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기자가 11일 이 마을을 찾아 김 이장과 대화를 나누던 그 순간에도, 4년 전부터 치매 증세를 앓고 있는 88세 어머니 백순매 할머니의 손길은 멈출 줄 몰랐다.
동네 사람만 지나가면 "이것 좀 무라(먹어라)"라며 밭에서 채 익지도 않은 대추들을 한 움큼씩 쥐여주는 게 어머니의 유일한 낙이자 삶의 방식이다.
이날도 어머니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방금 밭에서 따온 대추를 한 움큼 쥐어 기자의 두 손에 듬뿍 안겨주었다.
투박한 손길 끝에 묻어나는 따뜻한 온정이 뭉클함을 자아냈다.
"저도 복숭아 재배만큼은 돈 벌려 하는 게 아이지요. 집집마다 나눠주면서 인심 쓰는 재미로 하지만, 대추와 감자는 나름 수익을 생각하는데..."
김 이장의 말끝에는 쓴웃음과 함께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실제 대추와 감자는 김 이장에게 소중한 생계 수단인 반면, 복숭아는 이웃과 친지, 지인들에게 따뜻한 정을 나누기 위해 공들여 재배해 온 것들이다.
1100평 대추밭은 보통 8월 말부터 열리기 시작해 추석이 지난 뒤 찬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상자로 쳐줄 수 있다.
잘 말린 대추는 상자당 11만 원 선으로, 100상자 가량을 수확해 약 1000만 원의 쏠쏠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귀한 작물이다.
5월 말부터 캐기 시작해 6월 하지 전에는 수확을 마치는 감자는 씨감자 3상자를 심으면 한 이랑(1박스)에 20kg짜리 10박스가 쏟아져 나오는 풍성함을 자랑한다.
5월 초·중순경, 익기 직전 살짝 색깔이 바뀔 때 따야 비로소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신비 복숭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결실이다.
하지만 어머니 눈에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전부다.
남의 것 내 것 가릴 것 없이 "무라"며 재미 삼아 미리 다 따버리는 통에, 내 밭의 것은 물론 남의 밭 것까지 가리지 않는 소동이 매일 이어진다.
대추와 감자 농사를 두고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고, 그렇게 온동네 사람들에게 인심 쓴다고 어머니가 몽땅 따버린 귀한 열매들은 결국 아들이 정성껏 키우는 염소들의 밥으로 직행하기 일쑤다.
김 이장의 삶은 늘 흙과 땀에 젖어 있었다.
25살 때까지도, 심지어 군 휴가를 나왔을 때도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84년 울산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뒤에도 주말마다 고향을 오가며 농사를 병행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99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며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묵묵히 회사 일을 하면서도 집안과 고향을 지키던 그는 정년을 불과 4년 앞둔 2016년, 명예퇴직을 하고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귀향 후에는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고, 2017년부터 반장을 맡은 데 이어 2024년부터는 이장으로서 마을을 이끌고 있다.
주변에서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는 고충을 덜기 위해 요양원 권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병준 이장은 어머니를 시설에 보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1991년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장손으로서 지탱목이 되어온 그에게, 어머니는 치매를 앓아도 평생 품어야 할 삶의 뿌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도중 김 이장은 결국 참아왔던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시울을 붉히며 울컥 눈물을 보였다.
"효도가 말처럼 쉽지 않심더. 소녀마냥 저렇게 두면 좋은데 남의 밭의 것도…. 평생 어머니 모시고 살려고 했는데, 현실 앞에선…."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퍽퍽한 현실 속에서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익지 않은 대추를 다 따버려 염소 밥으로 만드는 어머니의 엉뚱한 장난도, 아들 눈에는 가슴 시린 애틋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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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에서, 오늘도 김병준 이장은 염소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따뜻한 "무라" 소리가 울려 퍼지는 마당을 쓸고 닦으며 장손의 묵직한 몫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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