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PE) 업계 캐릭터화 'PE Guy'
PE 말투·생활 과장·풍자로 수십만 팔로워
월가 영화·소설 등 사모펀드 대중 노출 영향
국내선 이재용·최태원 등 재벌총수 더 친숙
자녀 셋의 이름은 타란티노, 몬탁, 에비타(EBITDA)다. 아내 '와이피(Wifey)'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여름이면 부촌 별장으로 가고, 고급 휴양시설과 골프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뭔가 설명을 할때면 "섭스탠셜(substantial·상당한)"이라는 형용사를 수시로 붙인다.
미국 콘텐츠 크리에이터 조니 힐브런트 패트리지가 만든 가상 캐릭터 'PE Guy'다. 사모펀드(PE) 업계에서 일하는 부유한 남성의 말투와 소비생활을 비꼰다. 지난해 3월 인스타그램에서 시작한 관련 영상은 수십만명의 팔로어를 끌어모았다. 다소 과장된 모습이라 당사자들이 불쾌감을 드러낼 법도 하지만, 오히려 PE업계는 '쿨'하게 받는 분위기다. PE Guy가 화제가 되자 미국 PE·금융업계는 각종 행사에 출연 요청을 했고, PE Guy가 실제 업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모펀드 M&A의 핵심 용어 'EBIDTA'를 자녀 이름으로 짓는 디테일
인기의 비결은 디테일이다. 셋째 아이 이름인 EBITDA부터 PE 업계를 겨냥한 농담이다. EBITDA는 이자·세금·감가상각비 차감 전 이익으로, PE가 기업가치와 차입여력을 따질 때 자주 보는 핵심 지표다. 이를 아이 이름에 붙였다.
'Substantial'도 대표적인 말버릇이다. 한국어로 '상당한', '꽤 큰' 정도다. 정확한 숫자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연봉과 자산, 거래 규모가 보통 수준은 아니라는 인상을 풍길 때 쓴다. 힐브런트는 이 단어를 반복해 아예 'SUBSTANTIAL'이라고 적힌 모자까지 만들어 팔고 있다.
PE Guy는 막연한 '부자 금융맨'을 흉내 내지 않는다. 아이를 어느 학교에 보낼지, 여름을 어디에서 보낼지, 어느 컨트리클럽에 가입할지를 이야기한다. 재산을 대놓고 자랑하지 않으면서 대화 곳곳에 학벌과 직업, 소비 수준을 끼워 넣는다. PE 종사자들은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웃고, 업계 밖에서는 과장된 금융 엘리트의 생활상을 즐긴다.
"올여름 가장 핫한 남친은 PE맨"…한국은 어떨까
올여름에는 농담과 실제 연예뉴스의 경계도 흐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올여름 가장 핫한 뽐내기용 연인은 사모펀드 남자친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리스 위더스푼은 170억달러 이상을 운용하는 서치라이트캐피털 공동창업자 올리버 하르만과 영화 시사회에 참석했다. 니콜 키드먼은 이탈리아 포르토피노에서 PE 창업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됐고, 팝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도 금융업계 종사자 줄리언 크루넨버그스와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겼다.
WSJ은 "과거 기업 인수합병(M&A)의 악당으로 여겨지던 인물들이 이제 유명인의 남자친구로 주목받는다"고 전했다.
한국 연예계에도 PE 종사자와 결혼한 사례는 있다. 티아라 출신 효민은 지난해 베인캐피탈 한국사무소 김현승 전무와 결혼했다. 배우 겸 화가 이혜영의 남편은 MBK파트너스 부재훈 부회장이다. 배우 윤진이의 남편 김태근씨도 2024년 SBS 예능에서 자신을 "여의도에서 사모펀드 매니저로 일하는 김 부장"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윤진이는 남편의 일을 처음 들었을 때 "사기꾼인가 싶었다"며 "금융은 은행 말고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 대중의 인식에서 'PE'라는 용어가 얼마나 낯선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고 한국 PE 시장이 작은 것은 아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기관전용 PEF는 1195개, 출자약정액은 167조5000억원에 달했다. 단지 그 안에서 딜을 만드는 파트너와 운용역의 얼굴, 말투와 생활방식이 좀처럼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미국은 금융맨, 한국은 재벌…다른 '돈의 얼굴'
1989년 출간된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은 RJR나비스코 인수전을 다룬 논픽션이다. KKR을 비롯한 사모자본이 벌인 초대형 차입매수(LBO) 경쟁을 생생하게 묘사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문 앞의 야만인들’은 기업을 빚으로 사들이는 월스트리트 사모펀드의 공격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원본보기 아이콘미국에서는 투자은행가와 헤지펀드 매니저가 오랫동안 영화·드라마·책의 소재가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블랙스톤·KKR·아폴로 같은 사모자본 운용사들이 은행이 하던 영역까지 넓히면서 PE의 존재감도 커졌다. '마진콜'(2011),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빅쇼트'(2015) 같은 영화는 '월스트리트에서 큰돈을 굴리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줬다.
풍자가 통하려면 원본에 대한 공통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PE에서 일하는 남자'라고 하면 떠올릴 만한 직업적·문화적 이미지가 쌓였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효민의 남편이 베인캐피탈 전무이고 이혜영의 남편이 MBK파트너스 부회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져도 '한국의 PE맨은 이런 사람'이라는 캐릭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한국에서 '돈의 얼굴' 역할을 해온 사람들은 재벌 총수와 유명 기업인에 가깝다. 올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등하자 온라인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차 문을 열고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타"라고 말하는 AI 합성 이미지가 퍼졌다. 이 회장의 익살스러운 표정 등이 담긴 사진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종종 화제가 된다.
또한 기업인을 향한 관심도 과거와 달리 호의적으로 변화는 모습이다. 지난해 10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찾아 이재용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서울의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자 매장 앞에는 수백명이 몰렸다. 젠슨 황의 개인적 스타성의 영향이 적지 않지만, 총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세 CEO가 건배하는 사진은 '깐부 회동'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지난 6월에는 젠슨 황이 서울 홍대 인근 고깃집에서 최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삼겹살 회동'을 한다는 소식에 오전부터 시민과 취재진이 몰렸다. 젠슨 황의 개인적 스타성이 반영됐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총수 개인의 얼굴과 행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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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이 생중계 되는 과정에서 구 회장이 삼겹살의 비계를 가위로 잘라내는 장면은 뜻밖의(?) 화제가 됐다. 온라인에서는 "오너리스크다", "회사 물적분할 하듯 삼겹살도 물적분할한다", "분할상장 시그널" 같은 농담이 쏟아졌다. 사모펀드가 '약탈적 자본', '먹튀 자본'이라는 싸늘한 시선만을 받아온 것과는 사뭇 다른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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