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크루즈페리의 '숨은 엔진'…해진공의 750억 정책금융
7050만달러 선가 중 선순위 금융 95% 보증
고금리 후순위 대출 없이 신조선 건조…민간 선박금융 참여 이끌어
해진공, 2차 '중특프' 5년간 1.1조 공급…중견·예선·도선업까지 확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 정박한 2만2000t급 '팬스타 미라클호'에 올라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객실로 길게 이어진 복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객실은 일반적인 여객선의 좁은 선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침대와 화장실 등 내부 시설이 깔끔하게 갖춰져 있었고 일부 객실에는 바다를 바로 내다볼 수 있는 발코니도 설치돼 있었다.
배 안을 조금 더 둘러보면 여객선이라는 느낌은 한층 옅어진다. 야외에는 수영장과 러닝트랙이 마련돼 있고 선내 곳곳에는 승객들이 쉬거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여객과 화물을 함께 나르는 페리에 크루즈선의 관광·휴양 기능을 결합한 '크루즈페리'라는 설명이 와닿았다. 미라클호는 지난해 4월부터 부산과 일본 오사카를 잇는 국제항로를 운항하고 있다.
지난 6일 출항 당시 바다의 날씨는 좋지 않았다. 항구를 벗어나자 비가 내리고 파도가 높아지면서 배도 제법 출렁였다. 다만 궂은 날씨 속에서도 승객들은 객실과 선내 편의시설을 오가며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창밖으로 거친 파도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선내에서는 식사와 휴식, 여가가 이어졌다. 이동 과정 자체를 여행의 일부로 만든 크루즈페리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배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팬스타 미라클호는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된 최초의 크루즈페리다. 국내 연안·국제 여객선 시장에서는 해외에서 사용하던 중고선을 들여와 운항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새 배 한 척을 짓는 데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만큼 중소·중견 선사가 신조선을 발주하기에는 금융 문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미라클호 이후에도 국내 조선소에서 크루즈페리를 추가로 건조한 사례는 아직 없다.
미라클호 역시 전체 선가만 7050만달러에 달했다. 팬스타그룹은 2022년 7월 국내 대선조선과 건조 계약을 체결했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국내 최초로 건조되는 크루즈페리인 만큼 유사 선박에 대한 금융지원 사례가 없었고, 약 7000만달러가 필요한 대규모 신조 사업을 민간 금융만으로 추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배가 실제 바다에 뜰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의 정책금융이 있었다.
정책금융 타고 뜬 '국산 크루즈페리'…중소선사 신조선 길 넓힌다
해진공은 2022년 도입한 '중소선사 특별지원 프로그램(중특프)'을 활용해 팬스타의 선순위 금융에 채무보증을 제공했다. 선가 7050만달러 가운데 팬스타가 20%인 1410만달러를 자체 부담하고 나머지 80%인 5640만달러를 금융기관에서 조달하는 구조를 짰다. 해진공은 이 가운데 선순위 금융의 95%인 최대 5358만달러, 약 750억원을 보증했다.
해진공의 보증은 민간 자금을 끌어들이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산업은행·하나은행·부산은행 등 금융기관이 선박금융에 참여했고, 팬스타는 별도의 고금리 후순위 대출 없이 자기자본 20%만 투입해 신조선 건조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팬스타그룹 관계자는 "해진공의 보증을 통해 민간 금융권을 통한 자금조달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며 "정책금융 지원이 신조선 건조를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선박금융은 해운사가 새로운 배를 건조하거나 중고 선박을 살 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이다. 선박 자체가 고가인 만큼 선사가 자기자본만으로 구매하기 어려워 통상 선박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상당 부분을 빌린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자금력과 신용도가 낮은 중소선사다. 사업성이 있어도 기업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민간 금융을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해진공의 설명이다.
해진공이 2022년 중특프를 별도로 만든 것도 이 같은 금융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서다. 해진공은 2018년 설립 이후 선박금융을 중심으로 지원 범위를 확대해왔으며 2024년에는 항만·물류까지 업무 영역을 넓혔다. 2025년 말까지 145개사, 1548척에 총 15조4000억원 규모의 금융을 지원했다.
이 가운데 중소선사에는 28개사, 65척에 9146억원의 선박금융을 지원했다. 1차 중특프를 통한 지원액은 3887억원이다. 해진공에 따르면 중특프가 없었던 2022년 이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중소선사 지원액은 2배, 지원 척수는 1.4배 늘었다.
중소선사엔 높은 금융 문턱…5년간 1.1조 지원
해진공은 올해 중특프를 대대적으로 손질해 2차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앞으로 5년간 총 1조1000억원 규모의 선박금융을 공급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미리 배정된 보조금이 아니라 개별 사업에 대한 심사를 거쳐 공급할 선박금융의 중장기 목표 규모다. 1차 프로그램보다 지원 규모를 2배 이상 확대하고 예선·도선업을 새로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중소기업 기준을 넘어선 신규 중견선사와 지정학적 위기로 피해를 본 선사까지 문호를 넓혔다.
금융 조건도 완화한다. 선박 도입을 위한 투자·보증뿐 아니라 운전자금 대출이자를 연 2% 지원하고, 복잡한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지 않고 은행에서 선박담보대출을 받을 경우 해진공이 최대 150억원 한도로 보증서를 발급한다. 여러 선사가 공동으로 선박을 발주하면 금리를 추가로 깎아주고 사업타당성 검토와 외부회계보고서 검토, 재무·홍보 컨설팅 등 비금융 지원도 확대한다.
지원 대상 확대가 기존 중소선사에 돌아갈 몫을 줄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중견선사 몇 곳에 금융이 집중될 경우 1조1000억원으로 전체 규모를 키우더라도 정작 영세선사의 지원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해진공은 신규 중견선사의 수 자체가 많지 않아 기존 중소선사 지원을 잠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중특프 지원에는 척당 400억원의 한도가 적용되며, 현재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는 신규 중견선사도 한 자릿수에 그친다는 설명이다. 해진공 관계자는 "기존 중소선사에 대한 지원 건수와 금액은 최대한 유지하면서 신규 중견선사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규모를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선사·조선소·금융이 한 묶음…한국도 해운·조선 연결 숙제
중소선사의 신조선 확보를 더 늘리려면 개별 금융상품 확대를 넘어 해운과 조선, 금융을 함께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진공이 참고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선박금융과 '선박공유건조제도'다.
일본에서는 대형 은행과 지방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뿐 아니라 일본국제협력은행(JBIC), 일본정책투자은행(DBJ), 일본철도건설·운수시설정비지원기구(JRTT) 등 정책금융기관이 선박금융에 참여한다. 특히 선사와 화주, 금융기관, 조선소가 지역별로 긴밀하게 연결돼 선박 발주부터 금융, 화물 확보까지 이어지는 구조가 발달해 있다는 게 해진공의 분석이다.
대표적인 것이 JRTT의 선박공유건조제도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영세 선사가 건조비의 10~20%가량을 부담하면 JRTT가 나머지 일부를 분담해 선박을 공동으로 발주한다. 건조 과정에서도 JRTT가 감독과 검사에 참여하고 완성된 선박은 분담 비율에 따라 공동 소유한다. 선사는 7~15년, 경우에 따라 20년에 걸쳐 사용료를 내고 공유기간이 끝나면 JRTT 지분을 매입해 선박을 완전히 소유하는 구조다. 1959년 제도 도입 이후 누적 공유건조 실적은 4000척을 넘어섰다.
국내에서도 연안 여객선 현대화 등을 계기로 비슷한 방식의 선박공유 모델이 거론되고 있다. 해진공도 과거 일본 제도를 토대로 국내 도입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다만 일본식 모델을 그대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JRTT가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적자를 내고 있는 만큼 선박 건조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고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제도 도입의 핵심 과제로 꼽힌다.
김성진 해진공 선박금융부장은 "우리나라 중소 연안 여객선이나 내항화물선을 지원하는 데 좋은 모델"이라면서도 "선박금융에 대한 조달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팬스타 미라클호는 정책금융이 중소선사의 신조선 발주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국내 조선소의 건조 물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선례로 자리잡았다. 해진공은 미라클호에서 확인한 금융지원 모델을 중소·중견 선사로 넓혀 신조선 확보와 신규 항로 개척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이대로 가면 집값 폭등…발언 접겠다" 李 콕 집었...
김 부장은 "팬스타 미라클호는 정책금융을 통해 중소선사의 신조선 확보를 지원하고 국내 조선소의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로 연결한 사례"라며 "앞으로도 중소·중견 선사의 신조선 확보와 신규 항로 개척을 위한 맞춤형 금융지원을 확대해 대한민국 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내 해운·조선산업의 동반성장을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