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속 율곡·신사임당 그린 한국화 거장 이종상 화백 별세
5000원·5만원권 '모자 영정' 한 화가 손에서
독도·고구려 벽화 천착…한국화의 자생성 평생 탐구
루브르 지하 71m 설치벽화도…향년 88세
우리 지갑 속 5000원권의 율곡 이이와 5만원권의 신사임당. 화폐 속 모자의 얼굴을 모두 그린 한국화가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지난 8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전고 재학 시절 미술부 활동을 시작해 '루불' 미술동인을 결성했고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1년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대장간을 소재로 한 '장(匠)'을 출품해 특선했다. 이후 3년 연속 특선하며 당시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가 됐다.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은 화폐 영정이다. 고인은 30대이던 1970년대 율곡 이이의 화폐용 영정을 맡았다. 당시 스승 이당 김은호가 건강 문제로 작업하기 어려워지자 제자인 이종상을 추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영정은 1977년 발행된 5000원권부터 사용됐다.
2007년에는 한국은행의 의뢰로 신사임당 화폐 영정 제작에 들어갔고, 완성된 초상은 2009년 발행된 5만원권에 들어갔다.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들 율곡 이이가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한 화가의 붓끝에서 화폐 속 얼굴로 만난 셈이다.
영정 작업은 화업의 한 축이었다. 우륵과 광개토대왕, 원효, 윤관, 장보고, 김홍도, 윤선도 등 여러 역사 인물의 정부 표준영정을 그렸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전통 재료·기법을 연구하고 '현대진경'과 '원형상' 연작을 통해 한국화가 서구 미술의 문법에 기대지 않고 어떻게 현대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그가 평생 붙든 화두도 '한국 미술의 자생성'이었다.
작업의 규모도 전통적인 한국화의 틀에 머물지 않았다. 1975년 미국 텍사스에서 첫 초대 개인전을 열었고, 1997년 프랑스예술진흥협회(AFAA) 초청으로 파리 카루젤 뒤 루브르 샤를 5세 홀에서 중세 성벽을 활용한 길이 71.3m의 대형 설치벽화를 선보였다. 전통적인 붓과 먹의 언어를 건축적 공간으로 확장한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독도 역시 그의 화업을 설명하는 중요한 소재다. 1977년 독도를 찾아 직접 풍경을 그린 뒤 수십 년간 독도를 소재로 작업했다.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를 이끌며 문화예술을 통한 독도 알리기에도 나섰다. 2008년 일본에서 열릴 아트페어에 독도 그림을 출품하려다 현지의 반발로 작품 철회를 요구받자 행사 참가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고인은 서울대 미대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서울대 박물관장과 미술관장을 지냈다. 2003년 한국 미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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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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