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증명하는 '발견의 무게'
2010년대 자연과학 노벨상은 평균 29년 걸려
1987년 발견한 륄리에, 36년 뒤 노벨상

편집자주1901년 첫 시상 이후 125년. 과학은 한 명의 천재가 발견하던 시대에서 수천 명과 인공지능(AI)이 함께 연구하는 시대로 변했다. 아시아경제는 노벨상 125년을 통해 과학적 발견의 주체와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노벨상은 이러한 변화를 얼마나 담아내고 있는지를 7회에 걸쳐 살펴본다.
202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안 륄리에 스웨덴 룬드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레이저 실험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륄리에는 1987년 강한 레이저를 기체에 통과시키는 실험에서 고차조화파를 관측했고, 이 연구는 훗날 전자의 움직임을 아토초(100경분의 1초) 단위로 관찰하는 과학의 토대가 됐다. 첫 관측 36년 뒤인 202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룬드대(Jenny Leyman/Lund University) 제공

202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안 륄리에 스웨덴 룬드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레이저 실험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륄리에는 1987년 강한 레이저를 기체에 통과시키는 실험에서 고차조화파를 관측했고, 이 연구는 훗날 전자의 움직임을 아토초(100경분의 1초) 단위로 관찰하는 과학의 토대가 됐다. 첫 관측 36년 뒤인 202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룬드대(Jenny Leyman/Lund University)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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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프랑스의 한 연구실. 물리학자 안 륄리에는 강력한 적외선 레이저를 비활성 기체에 조사하다 예상치 못한 현상을 관측했다. 레이저와 기체가 상호작용하며 입사광보다 훨씬 높은 진동수의 빛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고차조화파(High-order harmonic generation)'였다.


이 현상이 훗날 '아토초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게 될 줄은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륄리에 역시 노벨재단과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결과라는 직감은 있었지만, 그 파급력까지는 가늠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고차조화파를 활용해 극도로 짧은 빛의 펄스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2001년 피에르 아고스티니와 페렌츠 크라우스 연구팀이 아토초 단위의 빛 펄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1아토초는 100경분의 1초로, 이전에는 들여다보기 어려웠던 원자와 분자 속 전자의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23년 노벨물리학상은 륄리에와 아고스티니, 크라우스에게 돌아갔다. 륄리에가 고차조화파를 처음 발견한 지 36년 만이었다.

발견은 태어난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발견과 수상 사이 30년…노벨상은 왜 수십 년을 기다리나[125년 노벨상 시대를 담다]③ 원본보기 아이콘

발견과 노벨상 수상 사이의 시간 간격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 분석에 따르면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의 주요 연구성과와 수상 시점 사이의 간격은 1960년 이전 평균 14년에서 2010년대 평균 29년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20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도나 스트릭랜드 역시 1985년 개발한 '처프 펄스 증폭(CPA)' 기술로 33년이 지나서야 영예를 안았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은 "하나의 발견은 태어난 순간에 그 의미가 모두 드러나지 않는다"며 "세월이 흐르며 후속 연구가 쌓이고 시야가 넓어진 뒤에야 그 발견이 인류 지식의 지평을 어디까지 넓혔는지 비로소 증명된다"고 분석했다.

과학이 스스로 오류를 걸러내는 시간, '검증'

발견과 수상 사이 30년…노벨상은 왜 수십 년을 기다리나[125년 노벨상 시대를 담다]③ 원본보기 아이콘

수십 년의 시차가 존재하는 또 다른 핵심 이유는 '검증'에 있다.


1980년대 초까지 위염과 위궤양은 스트레스나 과도한 위산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호주의 로빈 워런은 위 점막에서 세균을 관찰했고, 배리 마셜과 함께 연구를 진행해 1982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로 불린 세균을 배양에 성공했다. 그러나 학계의 의심을 넘어서야 했다. 마셜은 1984년 직접 균을 마시는 자기실험까지 감행했고, 수년에 걸쳐 증거를 축적한 끝에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첫 배양 성공 후 2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윤진희 한국물리학회장은 "실험을 통한 재현과 검증을 거쳐야 비로소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며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발견이라도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검증 과정은 생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초의 주장이 오류로 판명되거나 반대로 이례적 관찰이 검증을 거쳐 거대한 진실로 자리 잡는 과정처럼, 수상까지의 시간은 과학계가 스스로 오판을 걸러내는 자정의 시간인 셈이다.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배리 마셜(왼쪽)과 로빈 워런. 두 사람은 호주 로열 퍼스 병원에서 공동연구를 통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위염과 소화성 궤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82년 시작된 발견은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검증됐고, 두 사람은 23년 뒤인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The Nobel Prize 제공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배리 마셜(왼쪽)과 로빈 워런. 두 사람은 호주 로열 퍼스 병원에서 공동연구를 통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위염과 소화성 궤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82년 시작된 발견은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검증됐고, 두 사람은 23년 뒤인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The Nobel Prize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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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노벨상'이 한국 과학계에 던지는 메시지

물론 이러한 '지연'에는 부작용도 따른다. 노벨상은 생존자 수여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시차가 길어질수록 결정적 기여를 하고도 생전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노벨상의 '느림'은 단 한 편의 논문이 곧바로 위대한 발견이 될 수는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일깨운다. 검증을 견뎌내고 후속 연구를 파생시키며 새로운 산업과 학문을 창출할 때 비로소 그 발견의 진가가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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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원장은 이 점이 한국 과학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기초연구와 실패 위험이 높은 도전적 연구를 장기간 진득하게 지원하고 지켜봐 주는 토양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발견과 수상 사이 30년…노벨상은 왜 수십 년을 기다리나[125년 노벨상 시대를 담다]③ 원본보기 아이콘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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