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용량보다 적정량…달라진 가성비 기준
1인 가구 넘어 식단관리족까지 수요 확대
가격 낮춘 소용량으로 구매 장벽도 낮춰
"한 번에 굳이 많이 살 필요가 없어요."
업계의 오랜 공식이었던 '대용량 가성비'가 흔들리고 있다. 대신 마트 진열대부터 고급 외식 매장까지 크기를 줄인 소용량 상품이 빠르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많이 사야 단위당 단가가 내려간다는 오랜 상식을 깨고 필요한 만큼만 사서 깔끔하게 소비하려는 실속형 '적정량 소비'가 시장의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햇반 110g·유부초밥은 2알…'한 끼'의 기준을 새로 쓰다
변화가 가장 가파른 영역은 식품 시장이다. CJ제일제당은 최근 대표 백미 제품(210g)의 절반 수준인 110g 용량의 '햇반 부드러운 미니밥'을 선보였다. 지난 6월 출시된 '햇반 라이스플랜 미니밥'(파로통곡물밥·렌틸콩현미밥)에 이어 백미로 라인업을 확장한 것이다.
이 같은 소용량화는 탄수화물 섭취량을 조절하는 '소식좌' 소비자가 증가하며 시장 내 '한 공기'의 기준 자체가 달라진 영향이다. 닐슨 시장 데이터에 따르면 전체 즉석밥 시장에서 130g 이하 '작은 공기' 제품군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9%대에서 올해 상반기 16%대로 1년 만에 7%포인트 급증했다.
편의점 매대 역시 '한 끼'를 작게 만들고 있다. CU는 유부초밥을 기존 4개입(4000원)에서 2개입(1900원)으로 절반 줄이는 등 소용량 간편식 13종을 대거 확충했다. CU의 인공지능(AI) 기반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칼로리 부담과 남은 잔반 처리의 어려움을 미니 간편식 선호 이유로 꼽았다.
GS25가 1~2인 가구를 타깃으로 선보인 200g 규격의 '한끼 양념육' 역시 올해 축산가공 카테고리 매출을 전년 동기 대비 90% 끌어올렸다. 지난 4월 제품 개편 이후 이를 취급하는 주요 점포의 축산가공 일평균 매출은 이전 대비 250% 폭증하기도 했다.
프리미엄 백주도 65㎖…"비싸도 한번은 마셔본다"
소용량 전략은 초고가 주류 시장에서 진입장벽을 낮추는 체험형 상품으로 크게 빛을 발하고 있다. 중국 백주 수입업체 남경무역은 기존 500㎖ 제품의 8분의 1 수준인 65㎖ 초소형 제품을 일반 소매점용으로, 100~125㎖ 규격은 외식 업소용으로 공급을 대폭 늘렸다.
신세계L&B의 '와인앤모어'와 춘천 '세계주류마켓' 등은 매장 내 미니어처 전용 진열대를 구축해 위스키, 보드카, 진, 백주 미니어처를 판매 중이다. 500㎖ 한 병 가격이 수십만원에 달하는 프리미엄 백주 '몽지람'도 수만원대 65㎖ 미니어처로 전환되면서 진입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호텔과 기업형 중식당도 소용량 주류 도입을 가속화하고 있다. 워커힐 금룡, 몬드리안 서울 이태원 SMT차이나룸, 포시즌스 유유안,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 웨이브는 물론 모던눌랑, 시추안하우스, 팔진향, 모트32, 페이홍러우 등이 외식용 소용량 백주를 취급한다. 고도주 한 병을 온전히 주문하는 부담을 줄이고 두 사람이 부담 없이 나눠 마실 수 있도록 기획한 결과다.
커피도 250㎖→200㎖…가격 꼼수 '슈링크'와는 달라
최근의 소용량 기획은 가격은 그대로 둔 채 내용물만 슬그머니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이나 '용량 꼼수'와 엄격히 구분된다. 양을 덜어내는 만큼 소비자가 실제로 체감하는 가격 문턱을 정직하게 함께 낮추는 '적정량·적정가격' 전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양유업은 최근 컵 커피 '프렌치카페 악마의유혹' 용량을 기존 250㎖에서 200㎖로 20% 줄이는 동시에 가격 역시 1300원에서 900원으로 30.8% 인하했다. 초기 구매 지출액 부담을 대폭 낮춘 이 제품은 출시 불과 3주 만에 단일 도매 경로 주문량만 12만 개를 돌파했다. CJ제일제당 역시 햇반과 스팸 등 주력 제품의 중량을 약 20% 줄이고 가격을 낮춘 라인업을 확대 중이다.
남기지 않고, 덜 먹고…달라진 '가성비'의 기준
소용량 열풍의 근본적인 원인은 소비 패러다임의 변화다. 과거 가성비의 핵심이 '100g당 단가'였다면 고물가 장기화와 1인 가구 증가 속에서는 보관·폐기 비용까지 감안한 '절대 지출액'과 '실제 소비량'이 새로운 기준이 됐다.
여기에 식사량을 관리하는 '소식' 문화와 마운자로와 위고비 등 비만 치료제에 대한 관심 증대도 소식 트렌드를 부추기고 있다. 무조건 많이 담아주는 '푸짐함'보다 개인의 식사량에 꼭 맞춘 세분화 전략이 주효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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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보기 아이콘소포장 제품은 포장재 비중과 공정 고정비가 높아 단위당 생산원가가 대용량만큼 비례해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유통·식품업계가 제품을 잘게 쪼개는 이유는 구매 장벽을 크게 낮춰 신규 고객을 유입시키는 효과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만큼만 부담 없이 소비하는 것', 달라진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유통가의 필수 생존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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