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논리에 갇힌 80대
도축장→조리실로 바뀐 것뿐
문명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누군가 삶은 여전히 위태로워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갱更'에서 80대 노인 '천태'의 존재감은 강렬하다. 흡사 한 마리 맹수 같다. 천태의 말에는 고저가 없다. 언제나 성마른 소리를 내지르듯 뱉어낸다. 으르렁대며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맹수의 포효처럼 들린다. 머리는 맹수의 억센 털처럼 뻗쳐 있고, 시선은 대화 상대를 정확히 향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상대를 집어삼킬 듯 이글거린다.
천태의 삶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젊은 시절 부산의 한 대형 도축장에서 매일 수백 마리 돼지의 배를 갈랐다. 작업장 바닥에는 언제나 피가 흥건했다.
지금 천태가 일하는 도시락 조리실은 과거의 도축장과 딴판이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설비는 핏물에 녹슬 일조차 없어 보인다.
이곳에서는 20대부터 60대까지 여러 세대가 어울려 도시락을 만든다. 60대 '금옥'은 천태의 친딸이다. 천태는 젊은 시절 유복하게 키울 수 없다며 딸을 버렸지만, 면구스럽게도 나이가 들어서는 그 딸에게 의탁하는 신세가 됐다. 조리실 사장은 평생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외손녀 '피영'이다. 40대가 된 피영은 비슷한 또래의 '몽고'와 정부 지원금을 받아 조리실을 창업했다. 피영의 조리실에서는 20~30대 젊은 조리사 '바리'와 '도로시'도 함께 일한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깨끗함이 오히려 거슬렸던 것일까. 천태는 쉴 새 없이 돼지 배를 갈랐던 부산 도축장 시절을 영웅담처럼 늘어놓는다. 바리와 도로시가 돼지고기를 깨작깨작 다듬는 모습도 성에 차지 않는다. 외손녀이자 사장인 피영이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못마땅하다. 사장이 왜 직원들 눈치를 보느냐며 호통친다.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지만 천태는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1970년대의 맹목적인 논리를 설파한다.
얼핏 천태에게서 '독 짓는 늙은이'나 '방망이 깎던 노인'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하지만 두 노인의 성격을 규정하는 팔할이 장인정신이라면, 천태에게 장인정신은 이할에 불과하다. 나머지 팔할은 아집에 가깝다.
사고로 잃은 천태의 한쪽 팔은 아집으로 똘똘 뭉친 그를 한편으로 애처롭게 만드는 장치다. 천태는 산업재해로 보험금 1억3000만원을 받았다. 자신의 엄마를 버린 외할아버지를 피영이 받아들인 이유다. 피영은 당장 직원들의 월급 주기도 버거운 형편이다.
돼지 피가 흐르던 도축장이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조리실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흔해빠진 것들이 너무 많아 쉽게 망하고, 염치를 지키려다가는 굶어 죽기 쉬운 세상이다.
처음부터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던 극의 분위기는 천태가 사고를 당하면서 거센 소용돌이에 빠진다. 다소 상투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천태의 사고를 계기로 피영과 바리, 도로시 안에 숨어 있던 야만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험금과 실업급여를 둘러싸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냉정한 생존의 논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리실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음식을 만드는 소중한 공간이다. 동시에 뜨겁고 날카로운 도구가 가득한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리실은 눈부신 발전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위태로운 삶이 곳곳에 도사리는 현대사회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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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얽매여 있는 천태의 존재감 때문인지 어딘가 낡은 이야기를 꺼내놓은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작가는 맹수처럼 뚝심 있게 서사를 밀어붙인다. 그 우직함에서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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