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바뀌는 해외건설⑤]중앙亞 도시개발·호주 ESS 유망…"3년 공사 후 30년 운영 가능"
해외건설 수주전 '새 공식'
최근 미국 인프라 사업 수주전에서 G2G(정부 간 거래) 협력이 중요해지면서 국내 기업들은 공공 투자가 현지 진출 부담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토교통부의 '미국 정부 소개 건설사업 비공개 설명회'에 참석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행사 직후 "미국 시장은 초기 설계부터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다 무산되는 프로젝트가 적지 않다"며 "공공에서 투자를 단행하고 보증을 지원해주면 현지 진입 부담을 덜 수 있다"고 평가했다. 종합상사 관계자는 "정부 간 합의가 깔려 있어 실무 협의 속도가 빠르다"며 "미국 정부의 지원 의지도 강해 진출 적기"라고 했다.
미국은 자본 규모가 크고 현지 규제가 까다로워 우리 기업이 단독으로 뚫기 어려운 시장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지난 1월 미국 측이 현지를 방문한 김윤덕 국토부 장관에게 에너지 인프라 사업 참여를 제안한 데 이어 7월 네바다주 리튬·붕소 플랜트 사업 참여 양해각서(MOU) 체결 등 가시적인 성과가 이어졌다. '정부가 수주하고 기업이 참여하는' 새로운 사업모델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수조 원짜리 10여개 프로젝트 한꺼번에 풀려
10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한미가 고위급 협의를 통해 제안받은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10여개다. 프로젝트당 수조 원에 달하는 매머드급 인프라다. 캘리포니아주 윌로 록 에너지저장시설 20억달러(약 2조7000억원), 미시간주 염화칼륨 플랜트 19억달러(약 2조5600억원), 워싱턴주 암모니아 플랜트 15억달러(약 2조원), 네브래스카주 요소 플랜트 12억달러(약 1조6200억원), 테네시주 합성흑연 플랜트(사업비 비공개) 등이다. 수억~수십억 달러 규모의 비공개 사업들도 대기 중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 참여를 유도할 지원책도 내놨다. 에너지부는 대규모 대출을 조건부로 승인해 자금 조달을 돕는다. 농무부 비료 생산 확대 지원(FIELDS·필즈) 프로그램에 따른 최대 1억5000만달러 보조금도 포함됐다. 보조금은 상환 의무가 없어 사업자가 부담해야 할 자금을 줄일 수 있다. 표준화된 설계, 모듈러 패키지 방식을 적용해 우리 기업이 한 번 참여하면 후속 사업까지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전력구매계약(PPA), 장기 비료 구매계약 등으로 안정적인 현금 창출도 보장한다.
이들 사업에 지분을 투자하고 국내 기업 참여로 연결하는 역할은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가 맡는다. 국토부와 KIND는 우선 설명회 참석 기업들로부터 희망 사업과 참여 분야를 받아 사업주와 개별 면담을 주선할 계획이다. 이후 비밀유지협약을 맺고 사업별 '팀코리아'를 꾸린다. KIND는 올해 말이나 내년 상반기부터 현장 실사와 투자심의를 진행해 투자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美는 자본·기술, 韓은 새 일감…서로 필요해 손잡았다
이번 협력은 양국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미국은 중국 등 해외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내 생산시설을 늘리려면 대규모 자본과 기술, 기자재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을 끌어들이면 미국도 공장과 인프라를 빠르게 확충할 수 있다. 우리 기업은 진입 장벽이 높았던 미국 시장에서 현지 사업 경험과 일감을 확보한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셈이다. 한미 정부 간 고위급 협력으로 쌓인 신뢰도 이런 이해관계를 맞추는 데 힘을 보탰다.
미국이 제안한 투자개발형 사업은 공사 대금을 받는 단순 도급과 달리 지분을 투자해 준공 뒤 사업 수익에도 참여한다. KIND 등은 해당 사업을 위해 세운 특수목적법인(SPC)에 직접 또는 펀드를 거쳐 지분을 넣는다. KIND는 이 과정에서 국내 기업이 시공이나 기자재 공급을 맡도록 지원한다.
사업비는 주주 출자금과 금융기관 대출로 마련한다. 예컨대 총사업비가 5조원이고 주주 출자 비율이 20~30%라면, KIND 등 주주들이 1조~1조5000억원을 넣는다. 나머지 3조5000억~4조원은 금융기관에서 빌린다. SPC는 이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종합설계시공(EPC) 기업에 공사를 맡긴다. 준공 뒤에는 시설을 운영하거나 생산물을 팔아 발생하는 수익을 투자자가 배당 형태로 나눠 갖는다. 투자자는 장기간 배당을 받거나 보유 지분을 팔아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얻는다.
정부와 KIND 목표는 공공 투자를 국내 기업 일감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KIND는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우리 기업에 시공 등 물량을 배정하지 않으면 지분 투자 역시 단행하지 않겠다는 협상 전략으로 단순 재무 투자가 아닌 수주 마중물 역할을 수행한다. KIND는 앞서 지난 6월 미국 루이지애나주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설비(FLNG) 사업에서도 이 방식을 적용했다. KIND(7000만달러), 녹색펀드(3000만달러), 한국해양진흥공사(5000만달러) 등 공공 부문이 총 1억5000만달러를 공동 투자해 삼성중공업의 28억달러(약 4조원) 규모 EPC 수주를 끌어냈다.
중동 발전·담수화 확대…중앙亞 ·호주서도 투자처 물색
국내 건설사의 전통적인 수주 텃밭인 중동에서도 민관협력사업 비중은 커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국은 발전, 담수화, 교통, 도시개발 분야에서 PPP 발주를 늘리는 추세다. 특히 발전, 담수화 분야는 정부 신용을 바탕으로 전력이나 용수를 장기 구매하는 계약 형태가 많다. 중동 발전사업은 30년 동안 내부수익률(IRR)이 8.2~9%에 달할 만큼 알짜 사업으로 꼽힌다. 현재 삼성물산, 두산에너빌리티 등이 중동 대형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KIND는 발전, 담수화, 에너지 기반시설을 축으로 중동 투자를 확대할 방침이다.
우리 정부는 신흥 시장에서도 새 투자처를 모색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대규모 도시개발사업을 찾아내 국내 기업의 지분 참여를 주선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호주에서는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연계한 태양광 발전사업 진출을 검토 중이다. GS건설 등 국내 기업들도 동남아시아 신규 시장에서 시공을 넘어 투자개발사업 참여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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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기업들도 본격적인 프로젝트 지분투자를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손태홍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기술·관리연구실장은 "투자개발형 사업은 공사가 3년 안팎에 끝나도 운영은 20~30년 이어진다"며 "그해 수주 실적으로 평가받는 전문경영인이 중장기 투자를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도 전담 인력과 조직을 갖추고 장기 투자에 맞게 경영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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