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 종택·양궁·국궁 한데 묶어
차별화 도청신도시 넘어
체류형 관광거점 가능성
경북 예천군 호명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한쪽에서는 경북도청 신도시를 중심으로 아파트와 상업시설이 들어서며 도시의 외연이 빠르게 확장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백 년 세월을 견딘 고택과 종가문화가 조선 선비들의 삶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예천 관광의 새로운 가능성은 어쩌면 이 두 시간을 연결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국회 정책기자단과 수도권 경제 관광 전문기자단이 1일 찾은 호명은 송곡리 연안이씨별좌공종택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화려한 관광시설도, 인위적으로 꾸며진 체험공간도 아니지만 대청마루와 굽은 기둥, 담장 너머 사당에는 400년에 가까운 한 가문의 역사와 영남 선비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 지역 관계자들이 주목한 것도 고택 한 채의 보존 가치에만 머물지 않았다. 양궁과 국궁, 종택과 선비문화, 경북도청 신도시를 하나의 관광 동선과 이야기로 묶을 수 있느냐가 예천 관광의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김진모 호명 읍장은 종택을 찾은 기자단에게 호명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설명하며 지역이 가진 관광 잠재력을 소개했다. 호명은 과거 농촌지역의 성격이 강했지만, 경북도청 신도시 조성을 기점으로 지역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현재 35개 마을에 약 2만8000명이 거주하면서 예천의 대표적인 인구 유입지역이자 새로운 생활권으로 성장했다.
도청 신도시가 호명의 '현재'를 바꿨다면 송곡리 일대 고택은 이 지역의 '과거'를 붙잡고 있다. 그 중심에 연안이씨별좌공종택이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인 종택은 조선 선조 때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눌헌 이응이 아들 사고 이덕창(1569~1616)을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덕창은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창의해 공을 세운 뒤 내자 시정에 제수됐다. 선대가 살던 옛터에 집을 짓고 '사고구려(沙皐舊廬)'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 채의 고택 안에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흐름과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사가 함께 자리하는 셈이다.
건축 자체도 당시 사대부의 삶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이다.
종택은 낮은 야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자리한다. 대문에서 정침으로 향하는 마당은 경사진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높아지며, 축대 위에 본채가 놓였다. 동쪽 담장 밖에는 별도의 공간을 두고 사당을 배치했다.
본채와 대문채, 사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단순한 건물 배치가 아니라 조선 시대 가족생활과 제례, 손님맞이, 남녀 공간을 구분했던 유교적 생활 질서를 보여준다.
본채 역시 'ㅁ'자형을 기본으로 사랑채가 덧붙은 형태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채의 대청과 일부 방은 변형됐지만 오래된 기둥과 마루, 마당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골격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연안이씨 별좌공파 16대손인 이의창(82·전 교장) 종친회장은 기자단과 종택 곳곳을 걸으며 집안의 내력과 고택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들려줬다.
고택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자부심과 함께 고민도 묻어났다. 후손들이 외지에서 생활하면서 오래된 목조건축물을 지속해서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종택에 전해지던 고문서와 자료 일부도 사라져 역사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보존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남아 있지만, 그것을 다음 세대까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고택의 문턱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회장은 "예천에는 양궁뿐 아니라 국궁과 전통 고택 등 다양한 역사·문화자원이 있다"며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자원을 서로 연결해 예천만의 관광 경쟁력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예천의 대표 브랜드인 '활'이 새로운 연결고리로 떠오른다. 예천은 국내 양궁 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지역이다. 수많은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하며 현대 스포츠 양궁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활은 지역의 전통문화와 맞닿아 있었다.
현대 양궁의 역동성과 국궁의 전통성, 종택이 간직한 선비문화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한다면 예천 관광의 외연은 훨씬 넓어질 수 있다.
단순히 양궁장을 보고 고택을 둘러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활쏘기 체험과 종가문화, 선비정신, 지역 음식과 농촌 경관까지 하나의 동선으로 묶는 방식이다.
특히 호명은 경북도청 신도시라는 안정적인 생활·방문 수요를 배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농촌지역의 문화유산과 조건이 다르다.
신도시를 관광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아 예천 원도심과 농촌지역의 문화유산으로 방문객을 확산시키는 관광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 지역 문화재 정책이 '원형을 얼마나 잘 보존할 것인가'에 무게를 뒀다면 이제는 '보존된 문화유산을 어떻게 살아 있는 지역 자산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다.
고택 역시 문을 닫아놓고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관광자원이 되기 어렵다. 그 집에서 살았던 인물과 시대, 학문과 생활방식을 이야기로 복원하고 방문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오래된 건축물은 오늘의 콘텐츠가 된다.
최선희 예천군 홍보 소통과 장은 "고요한 산자락에 기대어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이 고택은 오늘도 예천의 역사와 선비정신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며 "옛사람들의 삶을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라고 말했다.
호명 읍의 경쟁력은 신도시와 고택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현대적인 경북도청 신도시와 가장 오래된 지역의 기억을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호명만의 자산이다.
여기에 예천이 이미 확보한 '양궁의 도시'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국궁과 선비문화까지 확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관광객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재의 숫자가 아니라 그곳을 찾아가야 할 이유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기술 좀 제발 가르쳐달라" 日 찾아갔던 한국…65...
400년 고택에 새로운 건물을 더하는 것보다 그 안에 잠든 이야기를 꺼내 오늘의 여행 방식으로 연결하는 일, 예천 관광의 다음 승부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