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칠레 '배티그'
피노누아·샤르도네 새 성지
최소 개입 양조 방식

편집자주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저가 와인'의 대명사 칠레에 대한 편견을 깼다. 길고 좁은 지형의 칠레에서 포도가 주로 재배되는 '센트럴 밸리'를 벗어나 칠레 남부 말레코 밸리(Malleco Valley)에서 칠레 프리미엄 와인을 개척한 와이너리 '배티그'는 최근 글로벌 와인 시장에서 '칠레의 신성'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배티그는 2013년 칠레 명문 와이너리인 '에라주리스(Errazuriz)'의 수석 와인메이커였던 프란시스코 배티그와 영업·마케팅 전문가인 카를로스 데 카를로스가 함께 세운 와이너리다. 프란시스코가 와인 제조와 양조 전체를 전담하고 카를로스가 와이너리의 브랜딩과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칠레 명문 와이너리 '에라주리스' 출신… 전설적 와인메이커 프란시스코

칠레 배티드 와이너리 공동 창업자인 프란시스코 배티그(오른쪽)와 카를로스 데 카를로스. 아영FBC 제공.

칠레 배티드 와이너리 공동 창업자인 프란시스코 배티그(오른쪽)와 카를로스 데 카를로스. 아영F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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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는 칠레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와인 메이커이자, 칠레 와인의 양조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라주리스에서 20년 이상 총괄 양조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아이콘 와인인 '세냐(Sena)'와 '비네도 채드윅(Vinedo Chadwick)', '돈막시미아노(Don Maximiano) 등을 만들어냈다.

특히 칠레 와인 사상 최초로 세계적인 와인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100점 만점을 획득한 '비네도 차드윅 2014'는 프란시스코가 총괄 양조를 맡아 완성했다. 비네도 차드윅 2014는 프랑스 보르도나 미국 나파밸리의 최고급 와인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티그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모두 프란스시코의 손을 거친다. 포도를 모두 손으로 수확하고 천연 발효를 사용하면서 '건지 농법(Dry Farming)'과 첨가물을 최소화하는 등 '최소 개입 양조' 방식을 통해 배티그의 와인은 생동감 있고 정밀하며 균형 잡힌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배티그의 공동창업자인 카를로스 CEO는 지난달 방한 당시 서울 강남구 르몽뒤뱅에서 열린 미디어 런천에서 "트라이겐에서 재배된 포도는 다른 칠레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보다 껍질이 얇고 당도가 낮다"며 "알코올 도수 자체도 일반적인 칠레 와인보다 낮아 포도 자체가 생동감이 있고 신선하다"고 말했다.

칠레 최남단 트라이겐… 프랑스 브루고뉴 '그랑크뤼' 비견

칠레 트라이겐 지역 지도. 비노 배티그 홈페이지.

칠레 트라이겐 지역 지도. 비노 배티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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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칠레 와인의 생산지가 아닌 트라이겐은 칠레 최남단에 위치해 서늘한 기후와 화산성 토양으로 이뤄진 지역이다. 큰 일교차와 풍부한 일조량, 서늘한 기후로 인해 포도의 숙성 기간을 늦춰 신선하고 맛있는 산미를 지니고 있다. 풍미의 농도가 높고 구조감이 좋은 프리미엄 피노누아와 샤르도네의 새로운 성지로 불리고 있다.


트라이겐 지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트루마오(Trumao)'라고 불리는 붉은 화산재 점토 토양으로, 배수가 잘되면서도 미네랄이 풍부해 와인에 정교한 미네랄리티와 짭조름함, 촘촘한 타닌 구조감을 더해준다. 또 칠레 중부지역과 달리 트라이겐은 연평균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어서, 인위적으로 물을 대는 관개 시설 없이 빗물로만 포도를 키우는 건지 농법이 가능하다. 포도나무 뿌리가 수분을 찾아 토양 깊숙이 내려가면서 '떼루아'(어떤 작물이 자라는 토양과 기후·자연 조건 등)의 특성이 와인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때문에 배티그를 비롯한 일부 와이너리가 트라이겐에 빈야드(포도밭)를 조성했는데, 알코올 도수가 낮고 텍스처(와인을 마실 때 입안에서 느껴지는 촉감적인 특성)가 우아해 프랑스 부르고뉴의 '그랑크뤼(위대한 등급을 뜻하며, 주로 와인에서 최고급 포도밭이나 그곳에서 생산된 와인을 지칭)'에 비견될 만큼 맑고 섬세한 샤르도네와 피노누아를 생산하고 있다.


배티그는 서늘한 기후에서 자라는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지 않고 피노누아와 샤르도네에만 집중하고 있다. 두 품종으로 충분한 강수와 화산성 토양를 가진 트라이겐을 대표하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배티그는 구획을 나눠 열별로 포도를 별도 수확하고 발효와 오크 숙성을 진행한다. 이 때문에 칠레에서 흔히 사용하는 '레세르바(Reserva, 일반 품질 수준)', '그란 레세르바(Gran Reserva, 고품질 수준)'등급 표현보다 포도밭과 구획의 출처를 중심으로 라인업을 나눈다.


카를로스 CEO는 "포도밭을 찾을 당시 중요하게 본 조건 중 하나는 기후변화 시대에도 장기적인 재배가 가능한 지역을 찾는 것이었다"며 "칠레 중부보다 서늘한 기후를 가진 남부로 시선을 옮겨 말레코의 트라이겐에서 가능성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고의 포도밭을 찾기 위해 트라이겐까지 왔는데, 아름다운 경사와 특별한 토양이 인상적이었다"며 "포도밭을 조성하기 전에 프랑스의 유명 지질학자를 데려와 토양을 관찰하고 적합한 땅을 결정해 샤르도네와 피노누아를 처음으로 심었다"고 덧붙였다.

"칠레 와인 새 지평 열어"… '자연 발효' 방식 고집

칠레 배티그 와이너리의 빈야드 모습. 아영FBC 제공.

칠레 배티그 와이너리의 빈야드 모습. 아영F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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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그는 2019년 첫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2020년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였다. 배티그의 와인은 출시 때부터 로버트 파커 등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로부터 "칠레 와인의 새 지평을 열었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현재 배티그는 20개국에 수출하고 있고 생산된 와인 중 20%가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다. 주요 라인업은 단일 포도밭에서 생산한 '비노 데 비네도', 정교하게 숙성된 '셀렉시옹 파셀라', 최상위 플래그십 라인이 '비노 데 파셀라'가 있다.


배티그는 인위적인 발효가 아닌 자연 발효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자연 발효는 발효가 느려지거나 멈출 가능성이 있어 관리가 까다롭지만, 배티그는 상업 효모로 특정 향미가 덧입혀지는 것보다 포도밭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대해 카를로스 CEO는 "부르고뉴의 사고방식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목표는 '부르고뉴 같은 칠레 와인'이 아니라 트라이겐의 샤르도네와 피노누아라는 독립된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칠레 '배티그'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 허경준 기자.

칠레 '배티그'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 허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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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그의 대표 제품은 '배티그 비노 비네도 샤르도네 2023'과 '배티그 셀렉시옹 파셀라 샤르도네 2023', '배티그 비노 비네도 피노누아 2023', '배티그 비노 비네도 카베르네 소비뇽' 등이다. 배티그는 품종별로 500~2500 케이스 수준의 소량만 양조하고 있다.


배티그 비노 비네도 샤르도네 2023은 코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복숭아와 배, 약간의 꿀 향기가 매력적이며 입에서 느껴지는 생동감 넘치는 산미와 미네랄감이 균형을 이뤄 긴 여운을 준다. 배티그 셀렉시옹 파셀라 샤르도네 2023은 복합성과 정교함, 숙성 잠재력을 보여주는 상위 라인업으로, 살구와 배의 과실향과 아몬드, 호두와 같은 견과류, 갓 구운 빵의 향이 느껴진다. 입안에선 신선한 감귤류의 맛과 은은한 오크향의 조화가 좋으며 적당한 산미와 긴 여운 등 구조감이 좋은 와인이다.


배티그 비노 비네도 피노누아 2023은 체리, 라즈베리 등 붉은 과일향과 섬세한 꽃향이 인상적인데, 신선한 블루베리와 딸기의 농축된 향이 적당한 산미와 어우러져 조화가 뛰어나다. 배티그 비노 비네도 카베르네 소비뇽은 달콤한 향신료의 향과 약간의 꽃 향이 느껴진다. 체리 등 검은 계열의 과일 풍미와 뒷맛에서는 다크 초콜릿과 삼나무의 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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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CEO는 "배티그에서 샤르도네는 우등생이고 피노누아는 아픈 손가락"이라며 "10년 넘게 투자했는데, 이제서야 성과가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허경준 기자 kjun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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