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에서만 쓰던 판축, 장미산성에서 확인
8만ℓ 목조 집수지·중앙양식 유물도 출토
"생활·무덤·생산·방어 공간이 하나의 세트로"

충주 장미산성 판축 성벽/국가유산청.

충주 장미산성 판축 성벽/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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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장미산성의 성벽 단면에서 켜켜이 다져진 흙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모난 틀에 흙을 일정한 두께로 넣고 단단하게 다진 '판축(板築)'의 흔적이다. 숙련된 기술자와 대규모 인력·재원이 필요한 고난도 공법으로, 그동안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 백제 왕성에서 주로 확인됐다. 백제는 왜 한성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한참 떨어진 충주에 왕성급 기술을 투입했을까.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된 장미산성은 둘레 약 2940m의 포곡식 산성이다. 장미산 정상과 계곡을 함께 감싸 남한강 물길과 충주 분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2022년부터 이곳을 발굴해온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는 지난 1일 현장을 공개하고 장미산성이 백제의 군사·교통 거점이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결정적 단서는 성벽 안쪽에 숨어 있었다. 지표에 드러난 성벽은 6세기 이후 신라가 쌓은 석축이다. 조사단이 성벽 일부를 절개하자 돌 아래에서 전혀 다른 구조가 나타났다. 흙을 층층이 다져 올린 백제 판축 성벽이었다. 함께 출토된 토기를 분석한 결과,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됐다.


임종덕 국립문화유산연구원장은 "장미산성이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백제 중앙의 기술과 조직력이 투입돼 운영된 곳이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충주 장미산성 목조 집수지/국가유산청.

충주 장미산성 목조 집수지/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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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급 토목 기술은 성 내부의 물 관리 시설에서도 확인됐다. 북쪽 계곡부에서 백제 한성기 목조 집수지 가운데 최대 규모의 시설이 발견됐다. 내부 한 변이 약 6.7m인 정사각형 구조로, 깊이는 약 1.8m다. 길이 7m가 넘는 밤나무와 참나무를 아홉 단으로 맞물려 쌓았다. 최대 저수량은 약 8만ℓ. 300명이 두 달 반 가까이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목재의 보존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온전했다. 집수지가 흙에 묻혀 직사광선을 피한 데다 물을 머금은 진흙이 산소를 차단한 덕분이다. 최관호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 특별연구원은 "1600년 전 목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라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를 통틀어 이처럼 온전하게 남은 목조 저장고는 장미산성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집수지는 단순한 물 저장고가 아니었다. 바닥에서 일부러 구멍을 내거나 깨뜨린 토기와 아직 사용할 수 있는 각종 도구가 나왔다. 이보람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집수지를 조성하거나 사용하는 과정에서 의례용으로 넣은 물품으로 보인다"고 했다.


충주 장미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한 유물들/국가유산청.

충주 장미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한 유물들/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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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는 1600년 전 산성 사람들의 식생활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사단이 집수지 내부의 흙을 물체질해 미세 유물과 유기물을 분석한 결과 쌀·콩·팥·밀을 비롯해 복숭아·자두·머루·산딸기·가래 등 다양한 곡물과 과실류가 확인됐다.


안소연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은 "고대 산성에서 이처럼 다양한 종자와 열매가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도정 흔적이 남은 볍씨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우엉 씨앗류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소·말·돼지·개·꿩의 뼈도 발견됐다. 소뼈에는 해체 흔적이 남아 있어 산성 안에서 도살해 소비한 정황을 보여준다. 반면 개는 거의 온전한 개체로 출토돼 단순 폐기물이 아닌 의례적 성격을 지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동물 뼈 주변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생활 도구도 함께 나왔다. 특히 철제 도끼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무 자루까지 온전히 발견됐다. 형태로 볼 때 무기보다는 생활 공구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함께 출토된 삼태기와 소코뚜레 역시 국내에서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실물 자료다. 이 연구사는 "당시 산성에서 소가 주요 물자 운송 수단으로 활용됐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유물 대부분은 5세기 전반 제작됐다고 추정된다. 한성에서 직접 들여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백제 중앙의 기술과 문화가 짙게 배어 있다. 백제가 이 시기 충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인력과 물자를 본격적으로 투입한 정황으로 해석된다.


충주 장미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한 자루 달린 완형 철제 도끼와 주조철부/국가유산청.

충주 장미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한 자루 달린 완형 철제 도끼와 주조철부/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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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장미산성에 공을 들인 배경에는 '철'이 있다. 충주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대표적인 철 생산지였다. 이 연구사는 "오늘날로 치면 반도체 첨단산업 거점과 같은 곳"이라며 "백제가 왕성 축조 기술까지 이전할 만큼 장미산성을 중시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도 중요했다. 충주는 한강 수로와 영남으로 향하는 육로가 만나는 곳이다. 특히 장미산 아래 목계나루는 근대까지 뗏목이 오가던 물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노량진·마포까지 내려가는 데는 사흘, 물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데는 일주일가량 걸렸다. 충주에서 육로로 갈아타면 문경새재와 이화령, 계립령을 넘어 영남으로 향할 수 있었다.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장미산성 일대를 "생활·무덤·생산·방어 공간이 하나의 세트로 갖춰진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다. 충주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도 차지하려 했던 전략적 요충지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고구려비와 신라 고분군이 함께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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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 충주를 놓고 벌인 각축의 전모는 아직 땅속에 남아 있다. 이번에 조사한 면적은 장미산성 전체 44만㎡ 가운데 2200㎡, 불과 0.5%다. 나머지 99.5%는 여전히 발굴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답의 영역이다.


충주=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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