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하다 쓰레기봉투까지 사재기"…장관이 말려도 안 통했던 '봉투 대란'의 속사정[에너지 오디세이]①
Ⅰ. 에너지 병목에 빠진 대한민국
쓰봉의 반란…전쟁이 드러낸 ‘에너지 빈국’ 대한민국
원유 한 방울 없는 나라의 비명…호르무즈발 ‘에너지 쇼크’
에너지 전환과 구조재편 틈바구니…기초원료 공백 딜레마
원유 직접 전환·재활용 총력…‘에너지 방어막’ 다시 세워야
# 충청남도 서산 앞바다로 원유(초경질원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 한 대가 들어온다. 부두에서 원유는 파이프를 통해 한화토탈에너지스가 보유한 탱크에 저장된다. 탱크에 저장된 원유는 증류 과정을 거쳐 LPG, 휘발유, 경유 등으로 분리된다. 이 과정에서 투명한 액체 상태인 나프타도 만들어진다. 정유시설(CFU)은 물론 나프타분해시설(NCC·Naphtha Cracking Center)도 보유하고 있는 한화토탈에너지스는 나프타를 NCC로 이동시킨다. 나프타를 800도에 달하는 고온에서 분해하면 먼저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기초 유분을 얻는다. 이후 급랭, 압축, 분리 공정 통해 정제하면 비닐, 포장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폴리에틸렌, 밀폐 용기, 자동차 부품 등을 만드는 폴리프로필렌 등이 만들어진다.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원유가 비닐·플라스틱 등 생필품의 원자재로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공급망은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충격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말 미국과 갈등으로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고 밝히자 원유 가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나프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는 나프타 수요의 절반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 수입 물량의 58%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중동산이었다.
나프타 수입길이 막히면서 쓰레기봉투 같은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고 사재기 현상으로 나타났다. 원자재 공급이 차단되고 가격 폭등에 대한 불안이 순식간에 전파된 것이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도입된 이후 벌어진 쓰레기봉투 사재기 현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직접 나서 "걱정하지 마시라, 괜찮다"고 발표했지만, 잠잠해지지 않았다. 김 장관은 결국 과거 코로나 시절 마스크처럼 1인당 판매 제한을 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격 치솟고 불가항력 도미노…수입 에너지 의존의 경고
두 달 만에 국내 나프타 가격은 75% 가까이 올랐다. 산업통상부 원자재가격정보에 따르면 나프타 가격은 2월 평균 t당 608.60달러에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직후인 3월 1018.64달러, 4월에는 1063.15달러까지 치솟았다.
원료 수급난에 나프타분해시설(NCC) 업체들의 불가항력 선언도 줄을 이었다. 불가항력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납품 계약을 이행하기 어려울 때 면책을 받는 조치다.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사인 여천NCC가 3월 인도 예정이던 원료 도착 지연을 이유로 가장 먼저 고객사에 이를 통보했다. 이어 롯데케미칼과 LG화학, 한화솔루션 등도 공장 가동 중단 우려 속에 불가항력 가능성을 알렸다.
쓰레기봉투 한 장에 온 나라가 흔들렸던 배경에는 원료 한 방울까지 해외에 기댄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나프타 가격은 두 달 만에 진정세로 돌아섰지만, 이번 사태는 중동 특정 지역에 쏠린 수입선과 대체 수단 부재라는 국내 공급망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부재하다.
차이나 머니에 밀려 설비 감축…기초 원료 안보 흔들린다
우리나라는 1972년 대한석유공사 시절 최초의 NCC를 가동한 이래 우리나라는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갔다. 특히,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베이징올림픽·상하이 엑스포 개최 등 경제 성장을 거듭하면서 석유화학 제품 수입이 급증했고, 국내 석화 제품은 중국 수입시장에서 대부분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중국이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이 대규모로 설비 증설하고 저가 범용소재를 내놓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물량을 앞세운 중국산 저가 에틸렌의 공세에 범용 소재 위주인 국내 석화업계는 속수무책으로 내몰렸다. 중국은 '기초 소재의 완전한 자급자족'과 국가 주도의 정유·석화 통합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해외에서 제품을 판매하지 못하면서 수익성이 악화하자 정부와 업계는 석유화학 구조 재편을 결정했다. 정부는 지난해 9월 NCC 총 생산능력 중 270만~380만t(최대 25%) 감축을 목표로 하는 '석유화학산업 구조 개편 로드맵'을 발표했다. 범용소재 생산을 줄여 공급 과잉을 해소하고, 고부가가치·친환경 제품으로 체질 개선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글로벌 생산량 2억3416만t 중 중국이 5823만t으로 24.86%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미국(4690만7000t), 사우디아라비아(1763만1000t), 한국(1301만2000t) 순이다.
구조 개편의 결과로 HD현대케미칼과 롯데대산석화가 합병한 1호 통합 법인이 4일 공식 출범했다. HD현대케미칼은 롯데대산석화를 흡수 합병(H&L어드밴스드)했다. 향후 3년간 수익성이 낮은 범용 설비 가동을 줄일 예정이다. 구조 개편 2호안으로는 여수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여천NCC,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 4개사가 통합 법인을 설립을 준비 중이다. 국내 석화 기업들은 범용을 줄이는 대신 고부가가치 산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석화 사업 재편이 끝나고 나면 범용 제품 생산량과 NCC 가동률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쓰레기봉투를 만드는 데 필요한 폴리에틸렌은 범용소재다. 중동 사태를 겪으면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범용소재라도 무작정 줄이는 것은 답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익성 논리로 생산 기반을 대폭 축소했다가 해외 공급망이 차단될 경우 제조업 전반이 마비되는 더 큰 위기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 통제 넘어 공정 혁신으로…기초 에너지 자립 시급
중동 사태 여파가 계속되면서 정부는 내년 1월까지 나프타 수출을 금지한 상태다. 나프타와 석유화학 제품 수급조정 조치는 8월 26일까지 운영할 예정이었지만, 중동 갈등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5개월 연장한 것이다. 연장 조치에 따라 나프타 사업자 등은 산업통상부 장관의 사전 승인이 없으면 나프타를 수출할 수 없으며 매점매석 행위도 금지된다. 나프타 생산량과 출고량, 출고처, 재고량 등은 매일 산업부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범용소재의 적자 구조를 벗어나면서도 국가 기간 산업의 기초 원료를 지켜낼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에쓰오일은 울산 석유단지에 '샤힌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다른 석화 기업들이 NCC 시설을 줄이고 있는 것과 달리 에쓰오일은 오히려 새로운 설비를 건설 중이다. 샤힌 프로젝트의 핵심은 원유를 직접 석유화학 원료로 전환하는 TC2C(Thermal Crude to Chemicals) 공정이다. 전통적인 방식 대비 한층 간소화된 분리 및 촉매 기술을 적용해 동일한 원유를 투입했을 때 나프타의 생산 수율을 기존 설비보다 3~4배 이상 획기적으로 끌어올린다.
에쓰오일은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유분 단계에서 중국이나 중동 대비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고부가 제품을 만들더라도 최종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부가가치 제품은 첨단 기술뿐만 아니라 경쟁력 있는 기초 원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이번 호르무즈 사태에서 확인됐듯,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외부 나프타 조달 구조는 외부 지정학 리스크에 극도로 취약하다"면서 "샤힌 프로젝트는 원료를 자체적으로 유연하게 확보할 수 있어, 향후 유사한 공급망 충격이 재발하더라도 강력한 방어막 역할을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기존 설비와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대안으로 1차 충격을 흡수하고, 중장기 과제로 단계별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다각화된 재활용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고 NCC를 대체할 공정 혁신과 바이오 기반 소재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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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 한국환경연구원 순환경제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이미 상용화된 기술인 폐플라스틱을 세척·파쇄해 물리적으로 재생 수지를 만드는 방식(기계적 재활용)을 가장 먼저 범용 저사양 제품군부터 확대해야 한다"면서 "신규 설비 투자 없이 원료 배합만 조정해 나프타 대신 LPG 투입 비중을 탄력적으로 늘리는 방식도 단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장기적으로 옥수수 전분당 등 바이오 기반 소재로 플라스틱을 만들거나 이산화탄소포집기술(CCU·Carbon Capture and Utilization) 기반 합성 나프타를 대체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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