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마지막 소망

다큐멘터리영화 '사진의 얼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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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년을 더 살지, 2년을 더 살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순간을 찍지 못할 것 같아 아쉽네요."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26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자신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진의 얼굴'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그는 서울 중구 을지한국빌딩 17층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아직 찍지 못한 사진이 하나 있다"고 했다. 바로 남북통일이다. "독일도, 베트남도 통일됐지만 한국은 여전히 분단돼 있네요."

구와바라는 남과 북을 모두 경험한 몇 안 되는 외국인 사진가다. 1964년부터 수십 차례 한국을 오갔고 평양도 여러 번 방문했다. 그에게 통일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이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오는 10월이면 만 90세가 된다. 혈류 문제로 수술받은 뒤에는 3개월마다 병원을 찾고 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속에 남은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다. 61년 전 부산항에서 만난 이름 모를 군인이다. 1965년 베트남 파병 열차를 촬영하던 당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 군인이 누구인지, 살아서 돌아왔는지 궁금하지만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수없이 많은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끝내 확인하지 못한 그의 안부는 오랜 세월 구와바라의 마음에 남았다.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 찍은 베트남 파병 열차 사진을 보여주며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던 군인을 그리워하고 있다./이종길 기자.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 찍은 베트남 파병 열차 사진을 보여주며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던 군인을 그리워하고 있다./이종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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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온 나라였다. 고향인 일본 시마네현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마을에도 한국인이 적지 않게 살았다. 도쿄농업대 재학 시절에는 한국전쟁을 피해 밀항한 친구도 있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마다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아리랑'과 '도라지'를 부르곤 했다. 구와바라는 "애조 띤 노래를 들으며 나중에 사진을 찍게 된다면 한국을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상했다.


곧바로 한국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취재에 필요한 여비부터 마련해야 했다. 그는 미나마타병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고, 1962년 개인전을 통해 이름을 알리며 자금을 모았다. 기회는 1964년 찾아왔다. 일본 출판사 헤이본샤의 월간지 '태양'으로부터 한국 취재를 의뢰받았다. 취재 주제는 부산과 서울 시민의 생활, 농어촌 풍경, 이은 황태자, 한국인과 결혼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여성, 거제도와 거문도의 어항 등 열 가지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맺기 전이었다. 도쿄에는 정식 대사관 대신 '주일본 한국대표부'만 있었다. 구와바라는 지인의 도움을 받고 잡지 '아리랑' 발행인의 신원보증까지 거친 끝에 가까스로 비자를 발급받았다. 그해 여름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그는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서울에 도착했다. 휴전 11년째로 한국 경제가 극심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다큐멘터리영화 '사진의 얼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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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보당국은 국내 기자의 취재를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외국 기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구와바라는 1965년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파병되는 해병대의 열차를 촬영하다 방첩부대 요원에게 붙잡혔다. 연행되는 동안 몰래 필름을 되감아 주머니에 감추고 카메라에는 빈 필름을 끼웠다. 그는 "요원이 '왜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지'라며 의아해하더니 카메라를 돌려줬다"며 "함께 촬영하던 한국 기자들은 그대로 붙잡혀 갔다"고 떠올렸다.


구와바라는 베트남에서도 카메라를 들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사진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꿔놨다. 1975년 종전 무렵까지 사진을 '전달'의 수단으로 여겼지만, 이후 하노이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부터는 '기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현장에 있어야만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은 역사의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의 시위와 근대화, 민주화 과정을 끊임없이 추적했다.


무엇을 찍느냐만큼 어떻게 다가가느냐도 중요하게 여겼다. 피사체 앞에서 무작정 셔터부터 누르지 않았다. 아기를 안아주거나 인쇄물을 건네며 먼저 관계를 쌓았다. 촬영 허락을 받으면 단 한 장만 찍었다. 구와바라는 "대부분 '벌써 끝난 거야' '더 찍지 않아'라고 물었다"며 "심리를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쁜 뜻은 없었다. 촬영을 허락해준 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다가갔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영화 '사진의 얼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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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천착한 소재는 도자기다. 도예가 약 서른 명을 촬영해 일본에서 사진집 두 권을 펴냈고, 작가론에 해당하는 원고도 직접 집필했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당시 만난 도예가들과의 교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 인연을 이어가는 것과 오늘날의 한국을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한국은 그에게 가장 촬영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발전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만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좀처럼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한국이 너무 빠르게 변했다"며 "격동의 시대를 상징하던 소재들이 대부분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비무장지대(DMZ) 정도"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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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바라가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고 싶은 장면은 그 철조망 너머에 있다. 그는 "통일의 순간만큼은 꼭 내 손으로 찍고 싶다"고 말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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