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갤러리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 개막
1970~2000년대 주요작 30점
9월1일 서교동 자택·작업실 '윤형근의 집' 첫 공개
청색과 다색, 물감 밴 바닥과 오래된 기물…그림과 삶을 두 공간에서 잇다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윤형근(1928~2007)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검은색보다 먼저 빈 곳이 눈에 들어온다. 1976년 'Umber-Blue'에서는 검은 두 기둥 사이로 누런 마포가 넓게 열려 있고, 1979년 'Blue-Umber'에서는 좌우에서 내려온 어두운 색면 사이로 한 줄기 공간이 남는다. 윤형근은 하늘의 청색(Blue)과 땅의 다색(Umber)을 섞어 거의 검게 만들고,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문'으로 삼았다. 1977년 자신의 그림에 '천지문(天地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윤형근, 'Umber-Blue', 1985. 마포에 유채, 61.5×49.3㎝. 청색과 다색이 중첩돼 거의 검정에 가까운 화면을 이루며, 1980년대 들어 한층 깊어진 색과 번짐을 보여준다. 윤성렬·PKM갤러리

윤형근, 'Umber-Blue', 1985. 마포에 유채, 61.5×49.3㎝. 청색과 다색이 중첩돼 거의 검정에 가까운 화면을 이루며, 1980년대 들어 한층 깊어진 색과 번짐을 보여준다. 윤성렬·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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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개막하는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는 이 문이 만들어지고 좁아지고 다시 단단해지는 30여년을 펼쳐놓는다. 1970년대 초기작부터 대형 '천지문', 1990년대 이후 검은 사각형으로 더욱 엄격해진 화면, 말년의 한지 작업까지 30여점을 PKM과 PKM+ 두 공간에 걸었다. 같은 청색과 다색인데도 초기 화면은 의외로 맑다. 푸른 물감이 천을 타고 제멋대로 흘러내리고, 색과 색 사이에 빛이 스민다. 시간이 흐를수록 색은 어두워지고 형태는 덜 흔들린다.


그 변화에는 미술사만큼 한 사람의 생애가 깊숙이 끼어 있다. 윤형근은 1947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 '국대안'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제적됐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 직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숙명여고 미술교사였던 1973년에는 부정입학 문제를 제기한 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금됐다. 그해 교단을 떠난 뒤 그림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8년 회고전에서 이 사건 이후 그의 화면에서 밝은 색이 사라지고 어두운 색조가 자리 잡았다고 짚었다.

윤형근, 'Blue', 1972. 캔버스에 유채, 70×69.7㎝. 짙고 맑은 청색이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초기작으로, 이후 청색과 다색으로 압축되는 '천지문' 회화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윤성렬·PKM갤러리

윤형근, 'Blue', 1972. 캔버스에 유채, 70×69.7㎝. 짙고 맑은 청색이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초기작으로, 이후 청색과 다색으로 압축되는 '천지문' 회화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윤성렬·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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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는 장인이자 스승이었던 김환기가 세상을 떠났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맏딸 김영숙과 결혼하면서 그의 제자이자 사위가 됐지만, 이후 스승의 영향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자기 색을 만들었다. 화려한 색을 버리고 청색과 흙빛 두 색만 남겼다. 큰 붓에 테레빈유를 섞은 묽은 물감을 흠뻑 묻혀 표백하지 않은 마포에 내리그으면 물감이 섬유를 따라 번졌다. 그에게 '검정'은 검은 물감 하나의 색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겹쳐 만들어낸 색이었다.

PKM+로 넘어가면 번짐도 점차 줄어든다. 1991년 윤형근은 서울에서 미국 미니멀리즘의 거장 도널드 저드를 만났다. 저드는 윤형근의 작품을 구입했고, 1993년 뉴욕 스프링스트리트에 그를 초대해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윤형근의 화면은 이전보다 커지고 사각형은 단호해졌다. 두 사람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접점이 있었지만, 기계적으로 정확한 저드와 물감을 천에 스며들게 한 윤형근의 방법은 정반대였다. 그 차이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알아봤다.


여기까지 보면 윤형근은 '천지문을 그린 단색화 거장'으로 정리된다. 이날 기자간담회 동선은 그래서 삼청동에서 끝나지 않았다. 작품을 본 뒤 차를 타고 마포구 서교동으로 이동했다. 9월1일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윤형근의 집'이다.

25일 서울 마포구 윤형근의 집이 개관을 앞두고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서울 마포구 윤형근의 집이 개관을 앞두고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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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담장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1983년 윤형근이 지은 집이 나온다. 이 터는 장인 김환기가 1963년 국민주택으로 분양받은 곳이다. 윤형근은 1967년부터 이곳에 살다가 기존 집을 허물고, 건축가였던 동생 윤도근에게 설계를 맡겨 주거와 작업 공간을 한 건물에 넣었다. 높은 층고와 노출 배관, 전면 유리창은 모더니즘 건축에 가깝고 2층으로 올라가면 목재 천장과 문창살이 나온다. 건축의 기능과 재료 선정에도 윤형근이 직접 관여했다.


가장 먼저 발을 멈추게 하는 것은 1층 작업실 바닥이다. 작품보다 먼저 오래된 물감 자국이 보인다. 거무스름한 얼룩이 콘크리트 바닥을 넓게 덮고 있다. 한쪽 벽 전체를 창으로 열어 자연광을 들인 이유도 그가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작업 도구와 시대별 작품을 남겼고, 옆방에는 드로잉과 노트, 편지, 사진을 모았다. 미술관에서 복원한 작업실이 아니라 그림이 실제로 만들어졌던 자리를 그대로 걷는다는 점에서 PKM에서 보았던 검은 색면의 인상이 달라진다.


2층에서는 화가가 조금 사라지고 생활인이 나온다. 거실의 고가구와 도자기, 오디오, 추사 김정희의 현판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에는 도널드 저드의 조각도 있다. 윤형근은 저드의 작품을 직접 구입해 평생 곁에 뒀다. 아내 김영숙이 사용했던 방에는 그녀가 모은 물건과 직접 그린 그림, 아버지 김환기와 김향안에게 받은 편지와 사진을 남겼다. '윤형근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한 화가의 성소로 꾸미기보다 한 가족이 살았던 흔적을 함께 보존한 이유가 여기 있다.

25일 서울 마포구 윤형근의 집이 개관을 앞두고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서울 마포구 윤형근의 집이 개관을 앞두고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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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은 1977년 메모에 "인간적인 척도가 곧 예술의 척도"라고 적었다. 또 예술을 생활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자 '흔적'이라고 했다. 작품만 보았을 때는 자칫 근엄한 미학 선언처럼 들리는 말이 집에 오면 조금 달라진다. 그가 고른 벽돌과 오래 쓴 의자, 물감투성이 작업실 바닥, 아내의 방과 친구의 작품까지 모두 보고 나면 윤형근의 검은 기둥 역시 삶과 따로 떨어져 만들어진 형식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두 장소를 함께 볼 때 온전하다. PKM갤러리는 윤형근의 그림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고, 서교동 집은 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금 더 가까이 보여준다. 서울대에서 쫓겨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권력에 항의하다 다시 갇히고, 스승을 잃었던 사람이 색을 거듭 덜어낸 끝에 남긴 것은 거대한 검은 면과 그 사이의 빈자리였다.

윤형근, 'Burnt Umber and Ultramarine', 1989. 리넨에 유채, 97.3×162.2㎝. 짙은 색면을 화면 가득 세우고 그 사이로 바탕을 가늘게 남긴 작품으로, 1980년대 후반 한층 엄격해진 윤형근의 '천지문' 회화를 보여준다. 윤성렬·PKM갤러리

윤형근, 'Burnt Umber and Ultramarine', 1989. 리넨에 유채, 97.3×162.2㎝. 짙은 색면을 화면 가득 세우고 그 사이로 바탕을 가늘게 남긴 작품으로, 1980년대 후반 한층 엄격해진 윤형근의 '천지문' 회화를 보여준다. 윤성렬·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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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에서 처음 보았던 그 빈 문이 서교동에 와서야 조금 다르게 보인다. 윤형근이 비워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아니라, 그가 살면서 끝내 그림으로 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들어갈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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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는 10월3일까지 PKM갤러리에서 열린다. '윤형근의 집'은 9월1일부터 10월17일까지 사전예약제로 운영하며 회차당 8명씩 도슨트와 함께 관람한다. 관람료는 2만원이다. 이후 2027년부터 봄·가을 시즌제로 공개할 예정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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