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울미술관 '김희천: 두더지들'…게임·영상·사진 등 120여점
생성형 AI 신작 '말린'·자동재생 게임 '레몬' 첫 공개
스크린이 현실이 된 뒤에도 남는 질문…"나는 어디에 있는가"
물가에 흰 새 한 마리가 서 있다. 평범한 자연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런데 누군가 묻는다. 이 영상이 정말 카메라로 찍은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김희천, '레몬', 2026. 두더지 '버터'가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믿은 레몬을 땅속으로 데려가 돌보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자동 재생 게임이다. 레몬이 생성되고 썩어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기술이 만든 세계에서 존재와 소멸을 묻는다.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제공
김희천(37)의 신작 '말린'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찬종은 정체불명의 수사관에게 이상한 의뢰를 받는다. 한 영상이 인공지능(AI)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촬영된 영상임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더 기묘한 것은 이 이야기를 담은 '말린' 자체가 생성형 AI로 제작된 4채널 영상이라는 사실이다.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는 데서 한 발 더 나갔다. 이제 진짜 쪽에 증명 책임이 생겼다.
서울 금천구 서서울미술관 지하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런 뒤집힌 세계가 대형 스크린마다 돌아간다. 20일 개막한 '김희천: 두더지들'은 김희천의 첫 대규모 개인전이자 지난 3월 문을 연 서서울미술관의 첫 미디어 작가전이다. 2023년 이후 게임과 영상 작업에 신작 '레몬', '말린', 사진 '.dng'를 더해 120여점을 펼쳤다.
김희천의 질문이 처음부터 AI였던 것은 아니다. 2015년 첫 비디오 작업 '바벨'에서 그는 "세계는 스크린이 되었다"고 썼다. GPS와 지도, 카메라와 데이터가 현실을 옮겨놓는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이후 관심은 조금씩 달라졌다. 과거 인터뷰에서 그는 가상 세계가 현실과 따로 존재한다기보다 기술 자체가 점점 보이지 않게 현실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면과 현실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했던 작가에게, 이제 그 둘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전시장에 있는 게임들은 묘하다. 게임인데 아무도 하지 않는다. '커터3'와 '더블포져'는 게임엔진 유니티로 만든 자동재생 게임이다. 관객 앞에서 캐릭터가 걷고 말하고 사건이 벌어지지만 조이스틱은 없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아도 시스템은 움직이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게임의 주인이 플레이어라는 오래된 전제가 슬쩍 무너진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한 4채널 비디오 신작 '말린'(2026)이 설치된 '김희천: 두더지들' 전시 전경. 실제 촬영 이미지와 AI 생성 이미지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에 '진짜'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지 묻는다. 사진 이동웅·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여기에 두더지가 나타난다. 신작 '레몬'의 주인공 이름은 '버터'. 앞선 두 게임에 이스터에그로 숨어 있던 두더지가 사실 두 작품 사이를 땅굴로 몰래 오갔다는 엉뚱한 상상에서 시작했다. 버터는 나무에서 떨어진 레몬을 자신과 같은 존재라 믿고 땅속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레몬은 썩는다. 버터는 또 다른 레몬을 만나기 위해 땅을 파고 물길을 내고 나무를 돌본다. 레몬은 게임 속에서 계속 태어나고 사라진다.
귀엽고 우스운 설정인데 전시 제목을 생각하면 두더지가 달리 보인다. 알고리듬은 화면 위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누르는지 쉬지 않고 기록한다. 두더지는 그 표면 아래를 다닌다.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두 세계 사이에 제멋대로 굴을 뚫는다. 미술관은 두더지를 기술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염원이자 하나의 자아로 고정되는 것을 흔드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굳이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길이 지도에 표시된 세상에서 두더지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간다.
전시 중 가장 조용한 공간은 오히려 사진이 걸린 긴 복도다. '.dng'는 김희천이 2023년부터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 5841장 가운데 124점을 골랐다. 죽은 동물, 식물에 붙은 곤충,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 거울에 비친 자신과 친구들이 작은 사진으로 양쪽 벽에 이어진다. 거대한 게임 화면과 AI 이미지 사이를 지나온 뒤라 이 평범한 휴대전화 사진들이 뜻밖에 낯설다.
김희천, '말린', 2026.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제작한 35분짜리 4채널 비디오 작품.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이 한 영상이 AI 생성물이 아니라 실제 촬영본임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의 '진짜와 가짜'를 되묻는다.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제공.
원본보기 아이콘그런데 작품명 '.dng'부터 함정이다. DNG는 '디지털 네거티브'의 파일 확장자다. 눈앞의 사소한 일상을 작가가 직접 찍었다고 해서 그것이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현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를 들기 전부터 우리는 화면으로 세상을 고르고, 저장하고, 확대하고, 버리는 법에 익숙해졌다. AI가 만든 이미지와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사이에서 이 전시가 끝내 묻는 것은 어느 쪽이 진짜냐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라고 느끼는 감각 자체가 이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전시는 친절한 편은 아니다. '커터3'와 '더블포져', '레몬'을 오가는 인물과 설정을 처음 만난 관객은 게임의 세계관 설명서를 뒤늦게 읽는 기분이 들 수 있다. 35분짜리 '말린'을 비롯해 영상의 호흡도 짧지 않다. 모든 작품의 서사를 따라가려 하면 금세 지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때부터 전시가 재미있어진다. 시스템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그 안에 머무르는 경험. 우리가 스마트폰과 알고리듬을 사용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김희천: 두더지들' 전시 전경. 게임엔진으로 제작된 자동 재생 게임 등 김희천의 미디어 작업을 대형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다. 사진 이동웅·서울시립미술관
원본보기 아이콘김희천은 2023년 인터뷰에서 기술을 다루는 작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했다. 기술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그것만으로 미술이 된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더지들'이 흥미로운 이유도 최신 기술을 얼마나 능숙하게 썼느냐에 있지 않다. AI도 게임엔진도 결국 도구다. 그 도구가 너무 자연스러워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그 안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지가 김희천의 관심사다.
그래서 두더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화면을 부수지도 않고, 시스템 밖으로 장렬하게 탈출하지도 않는다. 그냥 밑으로 판다.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작은 굴 하나를 만든다.
'세계는 스크린이 되었다'고 말한 지 11년. 이제 스크린은 너무 가까워져 스크린인지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두더지들'에서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은 기술의 미래보다 오히려 이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화면을 보고 있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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