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비워둔 '권한의 경계', 관행 깬 대법관 제청 충돌…李의 선택은
조희대 대법원장, 끝내 사전 조율 없이 서면 제청
청와대 "유례 없는 일방통보…결정 숙고 중"
받으면 '합의 없는 제청', 반려하면 '제청 거부' 선례
향후 대법관 인사 '룰' 좌지우지할 시험대
이재명 정부 첫 대법관 인사가 대법관 후보자의 적격성 문제를 넘어 이 대통령과 조희대 대법원장의 헌법상 권한을 둘러싼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조 대법원장이 청와대와 최종 합의에 이르지 않은 채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제청하자 청와대는 손 후보자의 제청을 반려하는 방안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조 대법원장의 '합의 없는 제청'을 받아들일지, 대통령의 '제청 거부'라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지 청와대의 선택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갈등의 시작은 지난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1월 21일 노태악 대법관 후임으로 심사 대상자 39명 가운데 김민기 수원고법 고법판사, 박순영 서울고법 고법판사,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 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4명을 추천했다. 조 대법원장은 같은 달 26일까지 법원 안팎의 의견을 수렴한 뒤 한 명을 이 대통령에게 제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청와대와 대법원은 최종 후보를 놓고 접점을 찾지 못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첫 대법관이라는 상징성 등을 고려해 김 판사를 1순위로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은 김 판사의 배우자가 이 정부 출범 뒤 대통령 몫으로 지명된 오영준 헌법재판관이라는 점 등을 부담스러워했고, 또 다른 여성 후보인 박 판사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인선이 장기 표류하면서 노 대법관은 결국 3월 3일 후임 없이 퇴임했다. 후보추천위가 후보를 추린 지 40여일이 지났지만 제청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양측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노태악 후임 자리는 다섯 달 넘게 공석으로 남았다.
인선 논의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흥구 대법관의 9월 7일 퇴임이 다가오면서다. 후보추천위는 지난 4일 김문관 부산지법원장,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예영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 김정중 광주지법 부장판사 등 4명을 이 대법관 후임 후보로 추천했다. 조 대법원장은 당시 "앞으로 합쳐서 다 열심히 잘해보겠다"고 했다. 노태악·이흥구 후임을 동시에 제청하면서 해법을 찾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지난달 14일 법원행정처장에 취임한 노경필 대법관은 청와대와 4~5차례 협의를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노태악 후임 후보추천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는 방안까지 검토했지만 일부 후보가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결국 조 대법원장은 8월 18일 노태악 후임으로 손 판사를, 이흥구 후임으로 김성수 판사를 동시에 제청했다. 노태악 후임 후보가 추천된 지 209일 만이었다.
합의도, 면담도 없이 靑에 서면 통보…제청 과정서 불거진 초유의 논란
논란은 후보 자체보다 제청 과정에서 커졌다. 그동안 대법관 인선은 법원행정처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이 후보를 조율한 뒤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만나 제청 의사를 밝히고 서면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최종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례적으로 법원행정처는 18일 손 판사를 제청하겠다는 뜻을 청와대에 전달했고, 조 대법원장은 이날 오후 3시께 서면 제청을 한 뒤 이를 공개했다.
이를 두고 대법원은 "합의하지 못했을 뿐 협의는 했다"는 입장이다. 노 처장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협의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반면 청와대는 최종 후보에 대한 조율이 끝나기도 전에 대법원장이 제청을 강행했다고 보고 있다. 대법관 후보를 서면으로 제청한 논란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대통령이 면담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이지만, 청와대는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받은 적이 없다고 맞서고 있어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청와대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성기홍 홍보소통수석은 21일 인터뷰에서 대법원의 이번 제청 절차와 관련해 "협의 절차를 건너뛴 일방적인 통보"라고 규정하면서 "1987년 이후 여러 전례와 관례를 살펴보고 법률적인 부분도 검토해가면서 (어떤 결정을 할지) 숙고하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는 합의 절차를 거친 김 후보자와 달리 손 후보자에 대해서는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내지 않고 재제청을 요구하는 방안을 비롯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쟁점은 '법적 의무 VS 관행'…향후 대법관 인사 '룰(Rule)'에 영향
이재명 대통령이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주권정부 제1차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부의 부패방지 대책을 종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반부패 관계기관 장관회의인 반부패정책협의회는 이 대통령 취임 후 이날 처음으로 열렸다. 2026.8.21 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문제는 헌법이 비워둔 '권한의 경계'를 사전 조율이라는 관행이 메워왔다는 점이다. 대법원장·대법관 등의 임명 절차를 규정한 헌법 제104조는 대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를 사전에 합의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반대로 대통령이 제청된 후보를 반려하거나 재제청을 요구할 수 있다는 규정도 없다.
다만 어느 한쪽이 자신의 권한을 일방적으로 행사해 상대방의 헌법상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해서도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이 제청 후보를 자의적으로 거부할 경우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반대로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의사와 무관하게 제청권을 행사할 경우 대통령의 임명권이 형해화될 수 있어서다. 그동안 양측이 공식 제청에 앞서 후보를 조율해온 것도 이 같은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해석이다
실지 대통령과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 전 사전 조율을 통해 이런 충돌을 피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최종영 대법원장이 제시한 후보군을 놓고 청와대와 갈등이 불거졌지만 최 대법원장이 김용담 광주고법원장을 제청하고 노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정면충돌로 이어지지 않았다.
청와대가 손 후보자를 받아들여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보내면 대통령과 최종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제청을 수용한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제청을 돌려보내면 이번에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정식 제청을 사실상 거부하는 전례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 앞으로 대법관 인사 규모까지 감안하면 이번 결정의 파장은 더 커질 수 있다. 지난 3월 공포된 개정 법원조직법에 따라 현재 14명인 대법관은 2028년부터 매년 4명씩 늘어 2030년에는 26명이 된다. 증원되는 12명과 이 대통령 임기 중 퇴임하는 기존 대법관의 후임을 합하면 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은 모두 2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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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관계자는 "이번 인선을 단순히 손 후보자 한 사람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다"며 "이번에 어떤 절차와 원칙을 세우느냐가 대법관 증원이 시작된 뒤에도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인사 협의 방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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